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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동행> 아이들이 준 선물

요즘 문학 강연을 많이 다닌다. 작년에는 130회를 다녔는데 올해는 더 늘어날 것 같다. 그냥 가까운 곳도 아니고 전국 곳곳을 다닌다.
 
자동차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힘이 부치고 청하는 일정을 모두 소화 해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도 나는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으려고 애 쓴다. 강연료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하지 않는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거리 따지고 강연료 따지고 강연 주제나 청중들 수준이나 계층을 따질 이유나 여유가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가서 아무 이야기나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웃고 한 숨 쉬고 우는 것이다. 그냥 사람들이 열광한다. 이야기에 몰입한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다. 그저 소소한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결코 나는 웅변가도 아니고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도 대단한 사상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별난 그 어떤 조건이나 특징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요 가난한 사람이요 늙은 사람, 조그만 시골 시인일 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나의 이야기에 목말라 하고 좋아하는가?
 
오로지 그것은 시 때문이다. 시를 통해서 위로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시 한 편에 울고 웃는다. 시가 마음의 좋은 약이 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시를 들으며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달고 싶어 하고 시들한 삶의 샘물에 소망의 두레박을 드리우고 싶어 한다. 지난해 6월, 인터넷 트위터에 오른 시들만 모아서 만든 책 《꽃을 보듯 너를 본다》란 시집은 1년이 되기도 전에 만 권을 찍었다. 놀라운 일이요 축복이다.
 
이러한 축복과 변화는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정서적 요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롭다고 한다. 힘들다고 한다. 우울하다고 한다. 소망이 없다고 그런다. 오죽하면 ‘3포 여성’이란 말이 다 나왔겠는가.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 이건 처음부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왜 그 좋은 연애를 포기하고 그렇게도 중요한 결혼을 포기하고 그렇게도 성스러운 출산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왜 오늘날 우리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부모 세대들이 어려운 여건들을 모두 이기고 우리를 낳아서 잘 길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쳤다고 생각한다. 힘들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불행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왜 그런가? 옷이나 밥이나 집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음이 고달프고 지쳐서 그런 것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바닥이라고 그러는데 이 또한 마음의 작용 때문에 그런 것이다.



2002년 초등 교장시절
아이들과 교정 풀꽃 그리다
지은 시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얘들아 너희들도 그래”


이러한 정황 위에 사람들은 시를 원하는 것이다. 시로서 위로 받고 싶어 하고 긁힌 마음의 상처를 치료 받고 싶어 한다. 그만큼 우리네 인간은 정서적인 존재요 영성이 투철한 생명체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또다시 눈물이 나려고 그런다. 한 사람 이 땅의 조그만 시인으로서 안쓰러운 마음, 부끄러운 마음을 더불어 가진다.
 
출발은 <풀꽃>이란 시 한 편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길지도 않은 시이다. 글자 수로 따져서 24자 밖에 안 되는 단출한 시이다. 시적인 수사나 탄탄한 구성도 없는 지극히 허술하고 쉬운 시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문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좋아한다.
 
참으로 이건 놀라운 일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시의 활용도 광범위하다. 책이나 언론 매체에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업적인 면, 교육적인 면에까지 널리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나는 ‘시라는 것은 시를 아는 전문가들을 위해서 쓰여지기보다는 시를 모르는 일반 대중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는 명제를 얻어내기도 한다.
 
<풀꽃> 시가 나의 다른 시들도 끌고 나간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이것은 <행복>이란 작품이다. 이 얼마나 머쓱한 문장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좋다고 그런다. 문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내게 이미 있는 것의 소중성을 일깨워 줌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아, 그렇다’ 그 유레카 앞에서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시 <풀꽃>은 요즘에 쓴 작품이 아니다. 벌써 10여 년 전, 2002년도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시절에 쓴 작품이다. 그 학교 아이들과 학부형과 주변 환경이 좋아서 4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한 초등학교에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단한 그림도 아니다. 복사지 한 장에 연필로 그리는 그림이었고 그림 그리는 대상도 학교 정원 풀밭에 있는 풀꽃이었다.
 
아이들이 하도 빨리,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기에 "얘들아 아무리 하찮은 풀꽃들이라 해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단다"라고 말하고 났더니 아이들이 또 그럴 수없이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애들아, 그건 너희들도 그래"라고 말하고 나서 그 말들을 그대로 시로 거두어들인 것이 <풀꽃>이란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아이들이 준 선물이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썰렁하게 이어온 기나긴 나의 교직생활. 자랑거리보다는 부끄러움이 더욱 많은 나의 교직생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시 <풀꽃> 하나만으로도 나는 스스로 보상을 받고 자긍을 되찾을 수 있다. 하기는 나에게 문학 강연을 청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러한 심정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방송국 사람들과 녹화하기 위해 옛날 학교를 찾아가 보았을 때, 그 학교 교사 중앙에 여전히 내가 교장 시절 내건 교육지표(캐치프레이즈)가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꿈이 있는 학교 사랑 주는 교육.’ 이게 얼마만이란 말인가. 좋은 것은 여전히 좋고 근본적인 것은 오래 간다는 생각을 그 때 다시 한 번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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