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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동행> 스승을 닮으려고 합니다

진심, 최선, 베풂 보여주신
세 분의 스승님 잊지 못해

검은 바지와 걷어 올린 ‘샤스’
40년 전 선생님 모습 그대로

故 김원룡 교수님과 짧은 만남
격려에 용기얻고 자책감 벗어

먼 훗날 단 세 명의 제자라도
스승으로 불러주는 말 듣고파


한번 따져보자, 과연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몇 명의 교사와 교수를 만나는지. 아마 어림잡아 100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몇 분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스승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세 분의 스승을 모시고 있다. 고교 수학선생님, 대학원 지도교수님, 그리고 우연히 만난 은퇴하신 교수님이다. 옛날 옛적 이야기지만 세 분을 떠올리면 여전히 감사함과 그리움에 가슴이 저려온다.
 
나는 고교 입학 전까지는 참으로 멍했던 아이였다. 공부를 못했지만 그게 창피한 것인지 몰랐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부를 안 해도 야단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만 있다. 야무진 꿈이 없는 대신 ‘꿈같은’ 사춘기를 보낸 셈이다.
 
그러나 고교생이 되면서 늦은 밤에 부모님의 한숨소리를 듣게 됐다. 누이 넷이 모두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했던 터라 그들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부모님의 고민과 걱정이 태산이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명문대는 고사하고 아무 대학교도 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부딪히게 됐다.
 
다행히도 대학은 수학 때문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됐다. 고교 수학선생님께서 칠판에 그리시는 완벽한 선과 원에 감탄하고 신기해 하다가 결국 수학에 재미를 붙여 좋아한데다가 열심히 공부하게 됐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매료됐고 남을 가르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선생님은 교실 밖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활동을 많이 하셨다. 특히 딱한 처지에 놓인 제자를 돕는 선생님의 모습이 멋있고 정의롭고 진실하게 보였다. 그래서 선생님의 겉모양이라도 닮고 싶었다. 내가 항상 입는 검정 바지와 걷어 올린 하얀 ‘샤스’ 소매는 그 선생님의 옷차림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 그 선생님의 영향력은 4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오히려 수학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고 싶었다. 응용수학자이신 지도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린스턴대 역사상 유일하게 사제지간의 대를 이어 석좌교수직을 물려받은 주인공이었던 지도교수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최선을 다하셨다. 제자들에게 당연히 그리하길 요구했고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를 탐탁찮게 여기셨다. 그래서 그 분의 제자 중 삼분의 일은 쫓겨나고, 삼분의 일은 스스로 떠나고, 나머지 삼분의 일만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연구실 분위기가 진지했다.
 
그런 지도교수님의 열정과 사고력을 본받고 싶었지만 많이 부족했다. 박사 자격시험에 턱걸이로 붙었고 연구 실적도 변변치 못했다. 그런데도 지도교수님은 내치지 않았다. 아마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만큼은 인정해 주셨던 것 같다. 오히려 연구실 운영을 맡길 정도로 무한 신뢰를 보여주셨다. 그게 연구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든 자극이 됐지만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노력한들 지도교수님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좌절감과 능력에 한계를 느끼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됐다.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나려는 마음으로 야밤에 짐을 꾸린 적도 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 한국에서 방문교수로 오신 원로 교수님을 우연히 만나게 됐다. 고고학자이자 국립박물관 관장이셨던 故 김원룡 교수님이었다. 버클리 캠퍼스에서 단 30분 정도 만났고 아쉽게도 그 후로 다시 만나 뵙지는 못했으나, 그 짧은 순간 교수님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덕담을 나누면서 “앞으로 잘 될 것 같다” 정도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를 베푸신 것뿐인데 그날 이후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됐다. 나를 자책감이라는 올가미로부터 해방시켜줬고 내 가능성을 새롭게 만나게 해줬다. 아직도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 분의 말씀 한마디를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말 한마디가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게 참으로 경이롭다. 그게 스승의 특별한 존재성인 모양이다.
 
스승님 세 분과의 만남은 매우 다르다. 잠시 잠시가 매우 길게 느껴지는 청년시절 아득히 길었던 8년이라는 세월을 밤낮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신 스승님이 계시는가 하면 인생시계의 찰나에 해당 되는 30분이라는 짧은 만남의 스승님도 계신다. 빈틈없고 정확한 전문성과 지성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분이 계시는가 하면 여유롭고 풍요로운 인성과 감성의 모델이 되어주신 분도 계신다.
 
하지만 세 분 모두 내게 진실, 최선과 베풂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삯을 얻는 방법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지식을 넘어서 지혜를 전달해주셨다. 그 분들이 지식전달자가 아니라 멘토였기 때문에 스승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제 다시 따져보면, 근 30년을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약 3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했다. 우연한 만남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학생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과연 그 중 몇 명이나 나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답을 알 도리가 없다. 스승이란 말은 오로지 제자의 입을 통해서만 불려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3000명의 제자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내가 내 입으로 "나는 그들의 스승이다"라고 말조차 할 수 없다.
 
아, 참으로 두렵다. 나는 스승님들로부터 지혜를 전달 받았건만 과연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었을까. 만약 내가 받은 지혜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한단 말일까. 스승님을 다시 뵙게 될 때가 곧 올 텐데 그 날이 두렵다.
 
그러나 다행이다. 아직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조금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진심과 최선을 다해서 스승님을 닮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다문 세 명의 제자들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에도 나를 스승이라고 불러주는 말을 들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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