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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2015교단수기 은상>살아야 하는 이유

 




지금부터 30여년전, 나는 5년차 교사였다. 새 학교로 발령받아 처음 출근하는 날. 버스에서 내려 교문에 서니, 운동장을 지나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교무실이 보였다. 다행히 교무실 문은 열리는데 사람은 안보이고, 날씨는 차가운데 난로도 피워져 있지 않았다.

‘교장선생님도 오늘 부임하신다던데 나 혼자 참 빨리 도착했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추워서 앉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교무실 밖을 무연히 바라봤다. 눈송이가 하나둘 내리는 차가운 날씨에도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6학급의 작은 시골학교라 학생 수가 적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넓은 운동장을 적은 숫자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는 게 아침햇살에 반사돼 약간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과 공을 쫓아 뛰어가는 데 이상하게 옷자락이 유난히 펄럭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형의 옷을 물려 입었더라도 너무 덜렁거려서 ‘혹시 팔이 없는 아이인가?’라고 생각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잘 뛰고 움직임이 빨랐다. 그러나 교문을 들어서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이내 그 아이는 잊혀졌다.

나는 5학년을 맡게 됐다. 교장선생님께서 "잘 부탁합니다. 그 반을 맡겨서 죄송한데 1년만 수고해 주세요"라고 하신 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마치 화장실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악취가 문을 여는 순간 교실에서 풍겼던 것이다. 그것도 시골의 재래식 화장실 냄새.

시골아이들이어서 안 씻어서 그럴까, 날씨가 추우니까 문을 열지 않아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난 땀 냄새,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섞여서 이런가 싶기도 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을 둘러보는 순간 아까 운동장에서 유난히 긴 팔을 덜렁거리며 뛰었던 아이가 보였다. 바짝 마른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 가느다란 목, 그리고 무엇보다 어른의 것으로 보이는 윗옷. 점퍼 같은데 마른 몸집에 비해 너무 컸다. 제일 놀란 것은 아이답지 않은 반항적인 아니 사람을 질리게 하는 표독한(?) 표정.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가서 다른 선생님에게 그 아이에 대해 물어봤다. 그 아이는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집의 장손이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엄마는 별별 약을 다 지어먹었고, 드디어 낳은 아이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부엌에서 동네에 돌릴 떡을 안치던 시어머니의 귀에 손자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시어머니는 어서 젖을 물리라고, 우리 귀한 손자 배고픈가보다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젖을 물려도 핏덩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지러지게 울고 버둥거렸다. 속이 타는 시어머니와 엄마는 아이가 벌레에게 물렸나 몸을 살폈는데, 이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항문이 없었다. 그저 배처럼 매끈한 엉덩이가 있을 뿐. 계속 먹기만 하고 배설을 못하니 아이의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에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도시의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는 얘기만 들었다. 대학병원으로 향했으나 현재의 의료기술로는 항문을 만들 수 없고 인공항문을 배 쪽에 달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배에 인공항문(대롱)을 달아 위에서 소화된 음식물이 장으로 가지 않고 바로 밖으로 배출되도록 했다.

그래서 배에 달린 대롱을 통해 위에서 소화된 음식물이 바로 가죽 주머니로 나오는 통에 음식물 냄새가 온 교실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누나가 학교 옆 강가로 데리고 가서 가죽주머니에 든 음식물을 비워주고 데리고 온다고 했다.

귀한 동생이 항문이 없게 태어났음을 안 누나들은 공장을 다니며 모은 돈을 내놓았고, 엄마 아빠도 시골의 논밭을 모두 내놓고 서울 큰 병원으로 다니며 부지런히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2년 뒤 정상적인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이 아이는 그만 가망이 없는 쪽으로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우리 반 아이가 교무실로 달려왔다. 그 아이가 아이들을 죽인다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남자교사와 함께 달려가 보니 아이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칼을 들고 아이들을 다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너 때문에 새 선생님이 가르치기 힘들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겨우 달래 아이에게서 칼을 뺏고 그날은 공부 대신 아이들에게 이 아이와 잘 지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한번이라도 이 아이를 가슴 아프게 하는 아이는 우리 반 자격이 없다고. 다른 사람의 힘들고 아픈 가슴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행동하라고 말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말조심, 행동도 조심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끔씩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관사에 가서 칼을 집어 들고 와 다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소리를 치며 난동(?)을 부린 탓에 나의 1년은 참 힘들었다.

그러나 1년 뒤 교장선생님은 또 내게 담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셨고, 나는 6학년을 마칠 때까지 그 아이를 맡게 됐다.

6학년을 마칠 무렵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걱정이 됐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주변 5개 면의 아이들이 모이는 중학교인데, 초등학교처럼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처지를 알고 이해해준다면 좋겠지만 만일 아이들이 괴롭히거나 아픈 곳을 지적한다면 어쩌지? 이 아이는 중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나는 중학교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이 아이의 출생, 몸 상태, 그 뒤의 변화, 성격, 냄새, 처리방법, 2년간의 상세한 행동, 담임 배정에 신경 써주시라는 부탁 말씀 등을 담았다. A4 용지 4장 분량을 정성껏 채우고 편지를 붙였다. 며칠 뒤 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 내게 전화를 주셨다. 편지 잘 읽었노라고, 좋은 담임을 찾아 맡기겠노라고 약속하셨다.

나는 집에서 좀 더 가까운 학교로 전근을 가게 돼 그 학교를 떠나게 됐다. 그렇지만 그 근방을 지나거나 그곳과 비슷한 지명만 들어도 늘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잘 지내는 거지? 언젠가는 과학이 발달돼 네 장애도 고칠 수 있을 거야, 힘내, 힘내야 해.’

그리고 2년 뒤 버스 안에서 우연히 이전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을 만나 그 아이 소식을 들었다.

"중학교 가서 1학년 1학기도 못 마쳤다고 하던데요. 그냥 집에 있답니다. 아이들이 냄새나고 더럽다고, 병신이라고 하도 놀리고 때리는 통에 도저히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교장선생님도 담임교사도 집에 가서 설득했는데, 아이들이 선생님 눈을 피해 하도 괴롭히는 바람에 몇 번 다시 다니다가 결국 포기했다더군요."

그리고 그 선생님은 덧붙였다.

"하긴 군대를 갈 수 있겠나? 취직을 할 수 있겠나? 장가를 갈 수 있겠나? 생각하면 참 답답한 인생이지요."

그 아이와 만난 지 30년이 지나간다.

나는 집에서나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도, 교문을 들어서면 모든 것을 다 잊고 학교생활에 집중하며 늘 즐겁고 후회 없이 지냈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을 천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끔은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왜 아이들이 그렇게 그 아이를 괴롭혔는지, 왜 친구로 받아주지 않았는지, 그냥 가엽게 여겨주지 않았는지, 그 아이의 삶의 무게를 한번만이라도 생각해주지 않았는지 등의 질문을 혼자 하곤 한다. 지금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다 죽여 버릴거야"라고 소리치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됐던 그 아이의 얼굴, 핏발선 눈동자, 칼을 든 가느다란 손목을 생각한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해답은 모르지만 그래도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아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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