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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사랑한다, 어쩔래.

젊은이들이 주변의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성 간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세태가 되었다. 가끔은 그런 당당한 행동이 부럽기도 하지만, 여전히 ‘정말 그렇게 다 드러내면 기쁨이 더 커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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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는 풍속과 세상 변화가 빠르다 보니, 갑자기 새로 생겨나는 말들이 많다. 신조어 사전을 보면 낯설고 이상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항목으로 등장하기까지에는 그 말이 이미 상당히 널리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러자면 그 말이 의미하는 어떤 현상이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PDA’라는 말이 신조어 사전에 올라 와 있었다. PDA가 뭐냐고 임의로 물어 보았더니, 내 또래들은 모르는 사람이 많아도, 학생들은 쉽사리 개인용 휴대 정보 단말기, 즉 PDA가 ‘Personal Digital Assistant’의 약칭이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PDA’가 ‘공공영역에서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Public Displaying of Affection’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따라서는 ‘Displaying Affection in Public’으로 풀이해 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이 주변의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성 간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세태가 되었다. 그 ‘애정표현’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신뢰를 잔뜩 머금고 있을 때는 아름답고 멋있기까지 하다. 돌아보면 그런 애정 표현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나 같은 기성세대는 그런 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부럽다. 사랑하는 사람을 온 마음과 온몸으로 껴안고, 내 사랑의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을 위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듯 가슴 벅차고 아름답다는 것을 마침내 세상과 우주를 향하여 보란 듯이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보면 사랑의 실존성을 몸으로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나와 너의 존재를 서로 가득 채우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역전이나 대로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공의 공간에서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다. 잠시 영웅의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 우리 사랑한다, 어쩔래’의 분위기가 약여하다. 그런데 모든 PDA가 반드시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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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민망한 것 두 가지를 심심치 않게 겪게 된다. 하나는 나이가 들만큼 드신 어르신들이 연출하는 민망함이고, 다른 하나는 새파란 젊은이들이 보여 주는 민망함이다. 제발 저러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누가 볼까 싶어, 조바심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제삼자가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서 볼이 화끈거린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그냥 보아 주기 어려운 꼴불견이라는 점에서는 막상막하이다.
어르신들이 보여 주는 민망함이란 지하철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면서 생긴다. 빈자리 하나를 두고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체면 돌보지 않고 우르르 달려와 밀치듯이 앉아 버리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다. 약주 한 잔 걸친 불쾌한 얼굴로 자리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앉아 있는 젊은이를 대갈일성 나무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 장면의 민망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그 젊은이가 주눅이 들고 볼이 부어 슬며시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는 장면을 보아도 민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고, 무어라 화난 기색으로 자리를 박차며 욕이라도 한 마디 내뱉고 사라지면, 내가 그 모욕을 다 뒤집어 쓴 듯 마음이 불편해진다. 함께 타고 있는 전동차 안의 승객 모두가 정서적 훼손을 크게 입는다.
새파란 청춘남녀들이 전동차 안에서 연출하는 민망함은, 차 안에 아무도 없다는 듯한, 자기몰입에 가까운 애정 표현을 보여주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도 그 몰입이 어떤 진정성과 더불어 짙은 감동의 계기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라면 애정 표현이 좀 진한들 흠될 것이 없다. 그런 애정 표현은 이미 보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감동적 분위기를 은근하게 전한다. 아! 저들 젊은 남녀가 사랑의 시련을 눈물겹게 이겨나가고 있구나. 이런 분위기를 말없는 중에 전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이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머금고 있어서, 아무 말 없는 중에도, 그 애정표현의 분위기만으로도 어떤 웅변 효과 못지않게 사람들을 감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문제는 애정표현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권태를 모면해 가는 방편인 듯, 성애적(性愛的) 희롱의 수준으로 상투화 된 경우이다. 남녀가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이목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붙이고 비비고 만지며, 상대의 가슴이나 배를 쿡쿡 찔러가며, 그리고 끊임없이 무어라 부질없는 킥킥거림을 반복하는 행태를 보노라면, 우리가 소중하게 인식하는 ‘사랑’이 가당치 않은 방식으로 천박해지고 조롱 받는 것 같아서 나는 속이 상한다. 우리 사랑은 이렇게 눈치 볼 것 없고, 그래서 우리들 감정은 우리 기분대로 분방하다. 우리는 우리들 본능적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그 누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충동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래 우리 사랑한다, 어쩔래.’ 뭐 이런 심적 태도가 읽혀진다. 장난기가 없이 스킨십 자체에만 골몰하는 경우는 자칫 변태의 분위기로 치달아서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보면 이런 사랑 행태에는 어떤 불안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상대에 대한 소유에 집착하여, 소유를 안타깝게 확인하려는 면모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 사랑의 운명적 모습을 당당하게 선언하며, 자기들 사랑의 관계가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각인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공시적(公示的)효과를 극대화 하는 점에서 만족을 찾는 것 같다. 이렇듯 공공의 자리에서 사랑의 몸짓을 공공연히 펼치는 심리 기제 속에는 ‘너와 나는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서로에게 소유된다’는 심리를 공공의 공간에서 확증 받으려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 메시지의 실질적인 발신자와 수신자는 그들 껴안은 두 남녀 자신들뿐일 수도 있다. 그들과 아무런 심리적 연대도 없는, 그저 기이한 호기심 정도로만 힐끗거리듯 훑어보는 대중들이 그들 ‘사랑의 연출’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진정한 수신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라도 서로에게 불안하게 죄어 오는 믿음 약한 사랑과 언제나 성에 안 차는 소유의 심리를 해소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그런 마음을 자기최면으로 강화하려는 몸짓은 아닐지. 에리히 프롬이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을 소유로만 확인하려 들면 그 사랑은 언제까지나 미숙할 수밖에 없다고. 사랑을 소유의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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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공간에서 시도되는 과도한 애정표현은 공공의 공간에 적합한 감동적 모티브를 가지지 못하면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된다. 우리들 모두 ‘사회적 인간’이고, 사회적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사회적 공간’이다. ‘사회적 공간’은 ‘공공의 공간’이다. 애정의 표현이 사회적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려면, 사회적 공감과 감동을 수반해야 한다. 하다못해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의 연애감정을 사회적 차원에서 어여쁘게 인정해 주는 어떤 사회적 감동의 계기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또 어찌 윤리적 정당성이 없는 감동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것을 문학이나 영화의 예술이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닐까.
1940년에 제작된 흑백 영화 <애수(哀愁)>(원제 : Waterloo Bridge)는 1950년대 말 이후 우리 영화 팬들에게도 큰 감동을 선사한 고전의 품격을 지니는 영화이다. 지금도 텔레비전 방송 명절 특별편성 ‘명화극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든 영화다. 로버트 테일러의 중후하고도 우수(憂愁) 짙은 연기와 여배우 비비안 리의 진실하고도 애틋한 눈빛이 아련한 잔상으로 오래 남는 영화다. 두 연인이 절박하고 간절하게 만나서 생사의 기약이 없는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워털루에서의 이별 장면은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린 명장면이다. 워털루 다리 위에서 이들 연인은 안타깝고 불안한 운명의 질곡 앞에서 실존의 사랑을 허무하게 확인하는 포옹과 키스의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 장면이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명장면으로 전해 온다. 이른바 공공영역에서의 애정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이 대목 애정 표현 장면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기표(記標)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진실을 향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윤리가 사회적 감동으로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써 사회적 갈등의 일대 사건인 전쟁을 감당하는 남자 주인공 로버트 테일러의 캐릭터 또한 사회적 감동을 견지해 내며 긴 울림의 의미를 생산한다. 더구나 신이 관장하는 운명의 변주 속에 약한 인간으로 아프게 순응하며, 사랑과 죽음을 동일한 인간적 책무로 감당하는 여주인공의 비극적 삶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의 전체적 울림 속에서 워털루 다리에서의 포옹과 입맞춤은 사회적 감동으로 매김된다. 권태로운 장난의 시시한 ‘애정표현’이 어찌 여기에 끼어들기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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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러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들 보는 데서 해방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면 마음의 즐거움과 감동은 배가하여 충천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즐거움과 기쁨은 공공적 노출이 강할수록 오래도록 지속되는지. 세상의 온갖 에너지들이 모두 질량불변의 법칙에 귀속되는 것이라면, 우리들 사랑의 심적 에너지도 그 총량은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그렇게 화끈하게 다 소진해 버리고 나면, 우리는 사랑에 관한 한, 좀 황폐한 마인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문득 우리 민요 ‘밀양 아리랑’이 생각난다. 이런 구절 하나가 익숙하게 귓가에 맴돈다.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마음 가득, 몸 가득 사랑인데, 포옹도 없고 입맞춤도 없고, 달려가 손잡는 일도 없다. 오래 떨어져 있던 애인을 만나는데도 먼발치로만 보고 입도 열지 못한다. 공공영역에서의 애정표현(PDA)은커녕 온갖 사랑의 기표들을 애써 감추어 들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목이 던져주는 내적인 에로티시즘에 한결 더 이끌린다.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한다고? 그런 식의 표현은 화끈하지 못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고양되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는가. 오늘도 전국의 야구, 축구 경기장에서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단골 응원가로 ‘밀양 아리랑’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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