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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는 무엇으로 성숙하는가

순수는 무엇으로 성숙하는가 순수는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때 묻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런 순수는 무엇을 통해 성숙해갈까? 모순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순수를 성숙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량과 불순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근자에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지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마음먹고 읽었다. 소설 <데미안>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한국에 선풍적 인기를 몰고 상륙해,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권장도서 목록에 빠짐없이 올라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장기 교양을 보증하는 대표적 독서 브랜드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지니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데미안>은 그때와 같은 강렬한 독서 열기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이른바 스테디셀러의 명망은 여전하다. 1919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하니, 이 소설이 지닌 감동의 보편성이 대단하다. 나도 물론 대학 시절 <데미안>을 읽었다. 그뿐이랴. 친구들과 어울리던 청량리시장 막걸리 집에서는 누가 더 진지하게 읽었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때는 지적 허영심 같은 것도 있어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 불확실한 것도 확신에 찬 듯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 나름의 사고와 앎의 순수성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데미안>은 대충 이런 이야기이다. 10대 초반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라는 악동에게 어두운 악의 체험을 고통스럽게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도움의 주인공 ‘데미안’을 만나 정신의 긴장과 해방, 지식과 무지, 선망과 열등감, 자아와 타자, 선과 악의 본질을 경험한다. 그런 경험에서 삶과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키우며 자아의 정신세계를 성장시켜가는 이야기이다. 스토리라인으로만 두고 보면 그다지 흥미진진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눈을 뜨면서, 밝고 안온하게 보호된 유년의 순수한 세계를 넘어 어둡고 칙칙하고 불량스러운 것들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성장기를 진지하게 대입한다. 세상의 음험한 것들에 저항하고 굴복하면서 순수의 영혼이 울먹거리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런 불량하고 음험한 것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양극을 오가며 다시 자아를 다독거리기도 하고, 주변의 타자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프란츠 크로머가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있었다. 내가 맨 처음으로 만났던 나의 크로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김○○이라는 아이였는데, 무언가 작은 꼬투리를 잡아서 돈을 가져오라고 위협했다. 그 돈을 그가 정한 날에 가져오지 않으면 이른바 벌칙 이자가 가속도를 달고 늘어 나갔다. 학교에 가는 일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그가 불량스럽고 힘이 세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제압할 방법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가 그 작은 시골 학교에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기만 해도 문제는 일시에 해결된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자존감이 허물어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에게 지혜롭게 보복할 수 있는 학급의 직책과 담임의 신임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방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나에게도 ‘데미안’과 같은 조력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 당시는 물론 <데미안>을 읽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이런 고통스러운 상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생각을 어렴풋 잠깐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확실한 결심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4학년 1학기 내내 고통스럽게 지내던 나에게 의외로 완전무결한 해결방안이 저절로 찾아 왔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사흘인가 되던 날 나를 괴롭히던 김○○가 웅덩이에서 멱을 감다가 익사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겪었던 정신의 충격은 참으로 싱클레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과 우주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위대한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그렇게 죽음으로 데려간 신에게 감사하다는 기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대응은 왠지 유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은 김○○이 꿈에 나타나서 돈을 가져오라고 닦달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이것은 나에게 막강한 혼돈이고 두려움이고 경이로움이고 긴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김○○가 죽고 난 뒤에도 그 누구에게도 그가 나를 괴롭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이 경험을 반추해 보면, 나는 순수한 아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정반대의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에도 나는 또 다른 크로머들과 꾸준히 내 인생의 무대에서 조우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귀가하는 30리 하굣길 소도시 외곽 삼거리 골목에서 폭력으로 돈을 갈취하던 또 다른 크로머들은 지나고 보니 친근감으로 소생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다시 쑥스럽게 만나기도 하고, 마흔 넘어서는 친구로 가까워지는 길을 함께 간다. 불량기는 무언가 고약한 운명에 의해서 덧칠되는 순수의 그림자쯤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아온 전체 인생 역정에서 김○○를 포함한 나의 크로머들은 나를 어떻게 도와주었을까. 나의 순수에 어떤 면역을 키워 주었을까.

다소 딱딱하고 현학적인 이야기로 흘렀으므로 좀 재미난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새해를 맞으면서 얼굴 한 번 보자고 옛날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 몇 명이 모였다. 자라던 시절의 순진무구하던 이야기들은 지금 들어보면 우습기도 하고 스스로 귀엽기도 하다. 따끈한 소주 한 잔이 돌고 우리는 함께 공유할 만한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오늘의 나이 든 연륜의 등불 아래 비추어 보았다.
무역업을 하는 나의 친구 박 사장이 어린 시절 자신의 순진무구를 이야기한다. 가정교육이 엄격하고, 남녀의 성적 이야기에 대한 것은 철저히 금기시 되었던 시절을 우리는 지냈다. 성(性)에 대한 금기는 성에 대한 무지와 소외로도 이어졌는데 이것이 곧 순수한 청년으로 인식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박 사장은 키가 작아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아이 취급이었고, 또 자신도 그런 분위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성적 음양의 이치를 모를 정도였단다. 그러니까 <데미안>식으로 말하면 그는 밝고 안온한 유년의 분위기에만 머물러 있었다고나 할까.

고1 어느 봄날 그의 큰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골 소도시의 구석진 마을이므로 동네가 다 아는 경사였던 셈이다. 결혼식 날 아침, 마을 골목의 불량기 있는 또래 아이들이 지나가는 고1 짜리 박 사장을 음험하게 히히덕거리며 불러 세웠다. 착하고 순진한 박 사장을 놀려주려는 속셈이었다.
“야! 니네 큰 누나 오늘 결혼하지?”
“그래 그렇다. 왜?”
“오늘 첫날밤 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아?”
“무슨 일은 무슨 일? 그냥 신랑 신부가 다정하게 자는 거지.”
바로 이 대목에서 녀석들의 킥킥거림과 희희덕거리는 숨결이 높았음은 물론이다. 녀석들은 소년 박 사장에게 첫날밤 신랑 신부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일에 대해서, 매우 불량하고 저속한 언어로 설명해 주었다. 박 사장은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첫날밤에 신랑신부가 한다는 그 해괴망측한 사건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고 놀리는 분위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더러운 놈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큰 소리로 외치며 그들에게 대들었단다. “우리 누나는 그런 누나가 아니야. 너희들이 우리 누나를 몰라. 우리 누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누나가 아니야!!”

녀석들의 웃음이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왔을 것이 보지 않아도 훤하다. 그런데 오늘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 이 추억담을 펼쳐놓는 박 사장의 표정이 맑고 밝다. 자신의 순진무구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비쳐 있다. 더구나 이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하는 우리들 모두도 참으로 맑고 아름다운 소품 하나를 마음의 풍경으로 담아 두는 듯하다. 박 사장은 그 순진무구의 힘으로 그의 인생을 그답게 경영해 왔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밝은 박수를 치는 우리들 마음은 순수의 편에 가있다. 그런데 기묘한 느낌을 어떻게 한다지. 불량기 가득 묻어 내었던 그 친구들도 밉지가 않다.

순수는 그 혼자만으로는 시들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다. 순수는 불량과 불순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름답게 성숙한다. 총체적 삶으로서의 인생이 마침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수는 무엇으로 성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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