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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 만해지니까

인생은 행운과 불운이 숨바꼭질하듯 릴레이 경주하듯 바통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먹고살 만해지는 때’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먹고살 만해지는 때’는 인생의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1. 사람의 생애 리듬을 인식하는 말 중에는 재미난 것이 많다. 모범생처럼 인생을 살던 사람이, 마치 그렇게 살아온 것이 후회라도 되는 양, 늘그막에 바람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그 정도가 맹렬했는지 ‘늦바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로 경구를 삼았다. 중년 이후 잘못된 생애 리듬을 관찰한 데서 얻은 인식론을 극명하게 반영한 속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쪽의 말도 있다. ‘인생 초년의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은 성실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아주 건강한 통찰을 담은 생애 인식론이다.
사람마다 인생 성장의 중요한 변곡점(變曲點)이 있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권력 자리에 나아가거나 승진하거나 하는 것 등을 그 변곡점(變曲點)의 자리에 놓을 수 있다. 그것을 나이로 말하면 ‘몇 살쯤 될 무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직업과 소득으로 말하면 ‘그때 그 일을 해서 돈을 좀 벌기 시작했을 때’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인생 경로에 여러 번의 변곡점을 겪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내 인생의 분수령(分水嶺)’이라고 붙일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 경력이 좀 쌓이고, 돈을 벌고 지위가 좀 나아져서 조금은 여유가 생기고, 그래서 살아가는 형편과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을 본인 스스로 느낄 때,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어떤 일상적 언어로 나타낼까.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지만 ‘먹고살 만해지니까’라는 말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표현만큼 한국적인 것도 없다. ‘먹고 산다’는 것은 인간 생존의 최저 지표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먹고살 만하다’라는 표현의 경지로 오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생존의 최저 지표가 아니라, 자만(自滿)의 지표쯤으로 상승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언어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묘미란 신통방통하다. 합리적 인식과 초월적 직관이 ‘먹고살 만해지니까’라는 표현에 이처럼 기묘하게 녹아있는 것이다. 아무튼 인생을 하나의 긴 흐름으로 보았을 때, 그 변곡점(變曲點)을 나타내 주는 지점이 바로 ‘먹고살 만해지니까’를 느끼게 되는 지점이다.

2. ‘먹고살 만해지니까’라는 표현은 재미있다. 이 표현을 ‘먹고살 만해진 당사자 본인’이 하는 경우란 주로 어떤 때인가. 이 말이 쓰이는 구체적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먹고살 만한’ 상황을 조롱하는 듯한 운명적 불운이 찾아오는 때이다. 그간 온갖 고생 다하고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해졌는데 아내가 죽을병에 걸리게 되었다든지,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해져서 부모님을 잘 모시려고 했는데 그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었다든지 하는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즉 ‘먹고살 만한 형편’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부조리한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인생이 부조리하고 모순이라는 것을 한탄하게 되는 뉘앙스가 깔렸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행운과 불운이 숨바꼭질하듯, 릴레이 경주하듯 바통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먹고살 만해지는 때’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먹고살 만해지는 때’는 인생의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나를 괴롭혔던 가난, 배고픔, 남들의 천대 등 나쁜 것들이 좋아지게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간 좋은 상태로 누리고 있었던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때인 것이다. 그래서 가난했지만 건강했었는데, 이제 이 변곡점(먹고살 만해진 지점)에서 건강을 내주어야 한다.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부부 사이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여기(먹고살 만한 지점)까지 왔는데, 이제는 부부의 사랑을 불운의 신에게 내주어야 한다. 세상에는 먹고살 만해지니까 바람을 피우고 가정이 망가지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먹고살 만해지니까’라는 표현을 남에게 하는 경우는 또 어떠한가. 이건 앞에서 살펴본 경우, 즉 본인 스스로 ‘먹고살 만해지니까’를 운위하는 경우보다 다소 고약하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그 사람 자체가 나쁘게 달라졌다는 의미를 달고 다닌다. 예컨대 ‘먹고살 만해지니까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고 잘난 척하는지!’, ‘먹고살 만해지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야!’, ‘먹고살 만해지니까 배고팠던 시절 생각도 안 나는 모양이군!’, ‘먹고살 만해지니까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 되더라고!’ 등이 그런 맥락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오히려 성범죄는 더 늘어난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이혼도 늘어난다. 이혼이 온전히 불행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상처나 아픔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재판도 늘어나고 분쟁도 더 많아진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차별도 더 심해지고 다양해진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청소년의 일탈과 비행도 늘어난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학부모들에게 교권이 망가지는 일도 더욱 늘어난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아이들의 욕설 언어도 더욱 거칠어지고 극성스러워졌다. 그 융성하고 위대했던 로마제국도 초기에 망하지 않았다. 제국으로서는 ‘먹고살 만해진’ 국세에 도달해 마침내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해 열어갔던 것이다.

3. 그렇다면 ‘먹고살 만해진다는 것’은 나쁘기만 한 것이란 말인가. ‘먹고살 만해지는 지점’이란 인생을 운명의 차원에서 볼 때도, 온갖 마(魔)가 끼는 지점이지 않았던가. 한 사람의 인성 차원에서 볼 때도 선하고 착하고 부지런하던 인성이 온갖 나쁜 인성으로 악화되는 지점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세상에는 ‘먹고살 만해진 지점’을 지나면서도 운명으로나 인성으로나 나쁜 인생의 경로로 빠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먹고살 만해진 지점’을 중요한 인생 경계(警戒)의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는 있다. 경계로 삼으면 지혜로 다가갈 수 있다.
‘먹고살 만하다’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일까. 사회적 경제 지표로서야 어느 정도 객관적인 제시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먹고살 만하다는 것’의 심리적 실체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각종 무늬의 욕망과 충동에 휘말려 어느 한 곳에 절대로 고정될 수 없는 변덕과 허영의 에너지로 마왕처럼 돌출한다. 즉, ‘먹고살 만한 상태’를 일정하게 만족시키는 수준은 없다. 잠시 만족했는가 싶으면 금방 새로운 욕망의 지평선이 저만치 다시 등장한다. ‘먹고살 만하다는 것’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지표인지도 모른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만족을 당기려 하지 말고, 그것을 지연시켜 가면서 사는 법은 없을까.
‘먹고살 만해진 지점’을 인생의 의미 있는 변곡점으로 삼는다는 것, ‘먹고살 만해진 지점’을 인생 성공의 중요 지표로 삼는다는 것에 혹시라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먹고살 만해졌다’라는 지표 말고 다른 것을 인생 경로의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말을 똑바로 해야겠다. ‘먹고살 만해진 지점’에서 찾아오는 불행과 불운은 운명인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먹고살 만해진 지점’에서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4.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아폴론 신전의 전실에 새겨져 있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설도 있고, 탈레스가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고대 철학자들의 전기를 썼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라는 사람에 따르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은 탈레스였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가 탈레스에 대해 쓴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온다. 탈레스에게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탈레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조한욱 교수의 <서양사 이야기> 중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먹고살 만해진 지점’이란 “너 자신을 알라”에서 벗어나려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동시에 ‘먹고살 만해진 지점’이란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는 일”에 나서기 시작하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가장 어려운 일에서 가장 쉬운 일로 옮아가는 쾌감이 어떠할까. 사람들이 이전 공덕을 다 싸들고 정치의 마력에 유혹되는 것도 아마 이 지점이 아닐까. 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이처럼 어렵다. |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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