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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진흥과 문화 융성을 통한 한국적 인성 정립 방안

[인실련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세미나]



세월호 참사의 상처가 미처 봉합되기도 전에 ‘임 병장 사건’, ‘윤 일병 사건’ 등 군대 내 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져 우리 사회가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는데 인성교육의 교실상륙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상임대표 안양옥)이 출범 2주년을 맞아 한국적 인성교육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는 세미나 및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 | 이효상 기자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상임대표 안양옥)이 교총회관에서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세미나를 개최한 지난 7월 24일은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엄숙한 분위기로 치러진 기념식에서 안양옥 상임대표는 “세월호 참사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고 정신적 가치를 가벼이 여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며 “인성이 진정한 실력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전했다. 기념식장에 모인 참석자들은 ‘인성교육 실천을 위한 인실련 단체의 다짐’을 함께 낭독하며 인성교육이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실천의지를 되새겼다.



이어진 세미나의 핵심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문화를 토대로 한 ‘한국적’ 인성 정립의 방안 모색이었다.
 


‘인성과 문화의 공공성’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 정원섭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학생들이 스스로 목적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며,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적 협력을 통해 공공의 과제에 참여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협력의 문화, 즉 문화의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동현 한국기초교양연구원 원장은 ‘인성교육, 인문진흥의 목적이자 문화융성의 지반’ 주제발표에서 “융합, 통섭의 가치에 주목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도덕적 자질을 충분히 갖춰 공동체를 영속할 수 있을 때 문화융성을 이룰 수 있다”며 덕성 함양을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강용철 경희여자중학교 교사는 ‘가족 자서전 쓰기’, ‘화날 때 7초세기’ 등 인성교육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제시하며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숨을 돌리고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세미나는 인성교육에 대한 현장 전문가들의 풍부한 경험과 제언을 나누며 한참을 이어졌다. 본지는 정원섭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손동현 한국기초교양연구원 원장의 주제발표를 요약해 싣는다. (박지윤 기자)




인성교육의 길,
인문학에서 찾는다


곧 사멸될 것 같았던 인문학이 언제 위기였냐는 듯 ‘열풍’이 불고 있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즉 문사철(文史哲)로 불리는 인문학은 우리 삶의 본질이며, 사람이 참된 삶을 살기 위한 철학이다. 자기개발서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알려준다면 인문학은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 주고 동시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혜를 준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생각하며 인문학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글 _ 정원섭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요사이 ‘인성(人性)’이란 말이 유난히 회자된다. 인성이란 글자 그대로 풀어보자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이것은 동서고금의 참으로 난해한 철학적 과제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수 없을지 모르는 인류의 숙제다. 동서고금의 많은 현자들은 인간의 가장 근본이 되는 특성을 ‘슬기로움’에서 찾았다. ‘슬기’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성은 다시 두 가지 유형, 수단적 이성과 목적적 이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인간의 근본적 특성, ‘슬기로움’
수단적 이성이란 어떤 주어진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령 서울에서 목포를 간다고 치자. 우리는 열차, 자가용, 비행기, 버스 등 교통편 중 소요 시간이나 비용 등을 고려하여 어떤 결정을 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다. 그런데 이런 수단적 합리성은 그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수단적 이성이 그 자체로 방치될 경우 위선이나 이기심, 심지어는 범죄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률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편법 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불법 행위마저도 뻔뻔스럽게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법과 도덕을 준수하는 척 하는 위선적 교지(狡智)가 탁월한 경우처럼 말이다. 따라서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목적 자체의 정당성을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합목적적 이성이 긴요한 것이다.
합목적적 이성이란 현재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가 타당한가에 대해 검토하는 능력을 말한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것은 목적 설정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목포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교통편으로 목포를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왜 목포에 가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 자체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이성이다. 이처럼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자 하는 능력이 인간을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점은 주어진 문제를 그대로 수용한 채 그 해결 방법을 재빨리 찾아내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목적 자체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여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는 자율적 행위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적을 정하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목적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따라서 인성교육이란 스스로 좋은 목적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좋은 사람’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義)와 화이부동(和而不同), 인성교육의 최우선 과제
인간은 또한 사회적 존재이다. 성악설을 주장하며 ‘예’를 중심으로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순자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람의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못한데, 그런데도 소와 말은 사람의 부림을 당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은 사회를 형성할 수 있지만(郡), 저들은 사회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분(分,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분(分)이 가능한가? 바로 의(義)가 있기 때문이다.(『荀子』,「王制」편)

사람만이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언명에서 보듯 동서고금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이렇게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인문 활동, 곧 문화를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분(分),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을 선천적 능력에 따라서 크게 ‘생산을 하는 사람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 등 셋으로 나누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은 ‘평등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거북하다.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해보자. 사회란 서로 다른 인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성 혹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자녀를 낳을 수 없기에 더 이상 지속할 수조차 없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협력할 때 생존이 가능하며 이런 협력이 왕성해질 때 비로소 문화가 융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인성교육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점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 자체를 번영하도록 하는 지름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융합 활동들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현장의 경우 문과와 이과 간의 구분 자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전공별로 세분화된 대학의 경우 융합적 교육이 가능하도록 교양교육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융합, 즉 이질성의 포용을 아무 원칙 없이 시도할 경우 사회는 발전이 아니라 무질서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순자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의(義)에 근거할 때 좋은 사회와 좋은 문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만일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리하여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하면 할수록 불의에 대한 유혹 앞에서 우리의 인성은 왜곡당하고 질식당하고 말 것이다.

문화의 공공성과 의(義)
‘인문(人文)’이란 ‘인류의 문화’를 뜻한다는 점에서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이라는 표현은 인간성(humanity)이나 문명(civilization) 뿐만 아니라 문화(culture)까지 모두 포괄한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Culture)’의 어원이다. Culture는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때문에 인문은 자연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공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요즈음 눈을 조금만 돌려 보면 ‘인문’ 혹은 ‘인문학’이라는 말이 온통 범람하고 있다.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文)·사(史)·철(哲), 즉 문학, 역사, 철학을 말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문사철(文史哲)은 학문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서 인간의 다양한 활동 및 그 결과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그렇다면 인문, 즉 문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순자의 말씀처럼 정의(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의의 핵심은 공공성이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은 동서고금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고민되어 온 주제이다. 서양의 경우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한 후 이를 매우 배타적으로 대립시켜 왔다. 이들은 사적 영역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공적 영역을 왜소화시켰으며, 개인주의를 사회 구성의 중요한 전제로 수용하면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사적 이해관계를 훼손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고대 희랍인들의 ‘자유’는 근대인들의 ‘소극적 자유’, 즉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간섭받지 않는 자유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인들에게 자유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폴리스라는 공동체가 사라질 경우 노예로 전락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희랍에서는 공동체 전체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 과정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두고 천치(天痴)라고 하였으며, 소피스트들은 정치 과정, 즉 아테네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원칙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체로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아테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는 순간 생명 자체를 부지할 수 없기에 아테네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협력 통한 문화적 공공성 신장
[자세한 내용은 월간<새교육>에 있습니다.]




'있어야 할 가치' 성찰하는
'지성교육' 강화를…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전적인 교육이념인 인성교육을 왜 새삼스럽게 다시 논의하자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류가 새롭게 맞이한 시·공간적 경계가 허물어진 ‘디지털 문명 시대’에서 이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도덕성’ 뿐이라는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글 _ 손동현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원장


인간은 자연적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자연적 삶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특이한 자연적 존재다. 이 점이 인간 존재의 이중성이요, 인간적 ‘딜레마’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정 인간의 인간다움은 바로 이 ‘자연성 극복’에 있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곧 문화요 문명이다. 따라서 문화적·문명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인간다움’이란 단순한 ‘사실로서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이를 극복함으로써 실현해야 할 ‘가치로서의 인간 이상’이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논할 때 ‘인성(人性)’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이상으로서의 인간다움, 즉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인성교육이란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각자의 개인적-공동체적 삶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골고루 길러주는 교육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성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전적인 교육이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인성교육에 대한 논의를 되풀이하자는 것일까?

정보시대의 문화사회적 상황
인류는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문명의 전환을 맞고 있으며, 이 전환의 진원(震源)은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은 ‘지능 강화의 정보기술(IT)’과 ‘감각의 확장인 커뮤니케이션기술(CT)’을 ‘정보통신기술(ICT)’이라는 하나의 기술로 융합한 데에 그 위력이 있다. 이러한 융합된 디지털 기술의 혁혁한 성과는 이른바 ‘유비쿼터스 커뮤니케이션(Ubiquitous Communication)’의 실현과 가상현실(Virtual Realty)의 출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 기술융합이 가져온 전대미문의 혁명적 성과는 사유와 지각의 융합 및 호환(互換)을 비생명적 물리적 공간 속에서 실현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의사소통 또는 정보교환 활동에서 자연세계의 시·공간적 제약을 최소화시키거나 무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요인이 인간 문명생활에 가져다 준 근본적 변화는 무엇일까?
첫째, 디지털 기술은 사유 대상을 감각 대상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선형적(線形的)’ 사유를 위한 긴장(緊張)을 피하고 ‘모자이크적’ 지각의 이완(弛緩)을 즐기게 한다. (마셜 맥루언(김성기/이한우 역), 미디어의 이해, 민음사 2002 참조)
그 결과 논리적 합리적 사고를 기피하고 감각적 지각을 선호하는 문화생활이 널리 확산되었다.
둘째,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디지털 기술은 거리(距離)의 소멸과 시간의 증발을 가져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충족 과정의 순차성과 단계성을 뛰어 넘어 동시적·총체적 욕구충족을 기대하고 추구하게 만들었다. 기술의 융·복합과 이에 기초한 산업의 융·복합 현상은 이러한 욕구 및 욕구충족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취해진 현상이다.
셋째, 디지털 기술은 공동체의 삶을 ‘유목화’시킨다. 사회조직은 거대하고 강고한 고정적 피라미드형 체계에서 작고 유연한 유동적 네트워크로 변화했다. 사회조직의 성격 역시 폐쇄적 독자성은 와해되었고 개방적 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사회 조직의 ‘탈중심화’, ‘탈영토화’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개인 간의 인격적 관계는 피상화되고 공동체적 유대도 약화된다. 개인의 고립화 현상이 심화되고 계층도 다원화, 분산화된다. 이것이 곧 삶의 ‘유목화’ 현상이다. (쥘르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역), 『앙티 외디푸스』, 민음사 2000 참조)
이 유목화 현상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최대 규모로 전개된 것이 곧 ‘세계화’다.
이러한 문화·사회적 상황에서는 ‘문맥이 없는’, ‘기원(起源)이 소실(消失)된’, 파편화된 정보들이 범람하여 우리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성도 결핍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는 정서적 요구도 피상적인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 자리를 내주기 쉽다. 또한 높은 층위에 자리 잡고 있는 숭고한 가치를 의욕(意慾)하고 이를 달성하려는 실천의지도 약화되고 만다.

인성교육에 대한 새삼스런 요구
오늘 한국에서 진지한 교육종사자들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 아닐까? 우리가 새삼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는 문명의 전환기적 상황이 우리에게 그것을 긴절(緊切)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초·중·고 각 학교 급별로 수준과 차원은 다르겠지만, 그 기본 오리엔테이션은 다 함께 바뀌어야 한다.
첫째, 통찰력을 길러줘야 한다.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문제는 대체로 여러 지식분야에 걸쳐 있는 복합적인 문제다. 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없으면 부분에 관한 전문지식도 무력해지기 쉽다. 따라서 문제연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찰력은 세분화된 여러 가지 자료를 하나의 틀 안에서 종합하는 능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융복합 교육이 절실해진 배경이 이것이다.
둘째, 다양한 양식의 정서교육이 복원되어야 한다. 심미적 감수성도 길러줘야 하고, 사랑의 숭고함도 각성케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인 것을 합리적 사유와 양립시키고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인격의 폭을 넓혀주는 교육이 복원되어야 한다. 즉 이성과 감성을 배타적으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양자를 함께 수용하여 넘나드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셋째, ‘유목화’되는 공동체를 견뎌낼 만한 도덕적 힘을 길러줘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시공간적 제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제도적·물리적 제약을 통해 시행됐던 도덕적 통제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이제 도덕성은 더더욱 각 주체의 내면적 자율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동체적 삶’이라는 인간 삶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아와 타아를 연결시키는 도덕성의 토대는 ‘공동체 해체’ 더 나아가 ‘인간성 와해’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인성교육은 지성과 정서와 덕성 함양이 골고루 이뤄져야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덕성 함양일 것이다.

인성교육의 필요조건, 도덕적 토대를 갖는 공동체 정신 함양
지식 전달에 역점을 두어왔던 학교교육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자세한 내용은 월간<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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