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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했던 영웅의 이야기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업적

이순신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수업현장에서도 아이들은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좋아하며 몰입한다. 실재했던 우리 영웅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대한 토론은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선조의 몽진에 대한 찬반토론을 하면서 군왕이 갖춰야 할 자세와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구국의 영웅, 이순신
2014년, 영화 <명량>의 거침없는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1,000만 관객을 넘어 역대 최다, 최단 기록을 차례로 갈아치우며 한국 영화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긴 스토리가 아닌 명량대첩 하나만을 소재로 하고 있고, 영화 전체의 절반이 전쟁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놀라운 흥행 기록을 보여주었다.
물론 영화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스토리의 전개가 허술하고 전반부의 내용이 지루하다,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있다, 전술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무엇인가 등의 부정적 평가와 역시 이순신 장군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장군의 모습에 감동이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왜군을 통쾌하게 날려버렸다 등의 긍정적 평가가 팽팽히 맞선다. 여기에 더해 영화 배급과 스크린 점유의 문제 등 잡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많은 관객이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흥행은 단순한 재미와 감동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됐든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존경하고 그에 대해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충무공은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위인이며 시대를 초월해 가치와 울림을 주고 있다. 필자가 장교교육 중 전술학 강의를 들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 이순신은 적국의 장군으로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상식에 맞다. 하지만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순신의 업적을 높이 찬양하고 있으며 해군학교에서 자신들이 패전했던 전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일본 해군 제독 도코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는 1904년도 러일전쟁에서 발틱함대를 격파하였다. 그는 전투에 나가기 전 이순신 장군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승전 행사에 참석한 한 사람이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해전의 영웅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나를 넬슨 제독과 견주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군신(軍神)이다. 나는 출전을 앞두고 승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간절히 빌었노라.”라고 답했다. 세계의 거의 모든 해군학교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 특히 한산대첩과 명량대첩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게 들어왔기에 막연하게 존경할 뿐 그 능력과 업적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오히려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일들이지만, 우리가 이것을 바라볼 때에는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믿기 어려운 전술과 용맹함으로 조선과 민족을 구해낸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과 짜릿함을 준다. 아이들에게 수업 중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좋아하며 몰입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재했던 우리 영웅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수업 이상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역사 돋보기

임진왜란의 발발과 전개

임진왜란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년에 발발한 전쟁으로 2차 침입인 정유재란까지 포함시킨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국 전환을 위한 목표에서 시작된 것으로 평가된다. 조정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 오지만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정쟁으로만 확산된 채 전쟁 대비 시점을 놓치게 된다. 1592년 4월 14일 고니시는 병선 700여 척을 이끌고 부산포에 침입한다.
부산진의 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어 고니시의 군대는 부사 송상현이 막고 있던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양산-밀양-청도-대구-안동 방면으로 진공한다. 조선은 기병 전술의 대가였던 신립을 중심으로 충주의 탄금대에서 방어전을 펼쳤지만 기상 악화와 용병술의 실패로 인해 전멸하고 만다. 당시 조선의 패배는 무기 체계의 낙후보다는 전투준비 태세의 부재로 볼 수 있다.

선조의 몽진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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