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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이기기, 강박 넘어서기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잰걸음으로 걷고, 조급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재촉한다. ‘빨리빨리’가 아무리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고 해도,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백의 미를 즐기고, 웬만해서는 뛰지 않았던 우리 민족이 ‘속도’의 강박에 걸려 자기 스스로를 옥죄는 삶을 살게 된 것이. 우울하고 속상하다.



01
한국사람 성질 급하다는 것은 외국인들도 잘 안다. 웬만한 동남아시아 관광지의 쇼핑 거리에 가면, 지나가는 한국사람을 ‘형님!’하며 불러놓고는, 물건을 사라고 권유할 때는 ‘빨리빨리’를 연호한다. 그만큼 한국인의 조급한 성품이 일종의 ‘민족 기질 브랜드’가 되어 세계에 알려졌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어떤 사람은 무언가를 빠르게 해내려 하고, 부지런하고, 적극적이라는 면에서 한국인의 빨리빨리 특성을 좋게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역시 ‘빨리빨리’ 정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에는 ‘한국인 식별하기’라는 코믹한 내용이 떠다닌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국사람은 계단을 올라갈 때 한꺼번에 두 계단씩 오른다’, ‘한국사람은 자판기에서 커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컵을 잡고 기다린다(때때로 컵을 잘못 겨냥하며 잡고 있어서 흘러나오는 커피에 손을 데이기도 한다)’, ‘한국사람은 자판기에서 거스름돈 뺄 때 레버를 두 번 이상 돌리거나 누른다….’ 사실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두 번씩 웃어 본 기억이 있다. 왜 웃었을까. 아마도 내가 늘 그렇기 때문에 웃었을 것이다. 웃는 이유는 또 있다. 그렇게 조급한 모습이 실제로도 좀 우습기 때문이다. 이때 우습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스러움에서 약간 벗어나 있을 때 우리는 웃는다.

그 밖에도 ‘한국인 식별하기’ 항목은 무수히 많다. 한국사람은 전철에서 내리면 걷지 않고 뛰어간다. 지금의 이 빠르기로는 살 수 없다는 문화적 유전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람은 택시를 타고 갈 때, 창밖은 보지 않고 요금 미터기만 본다. 빨리 가기를 바라는 심리와 시간은 돈이라는 인식이 서로 상승하여 승객의 마음이 요금 미터기를 강박한다. 바쁜 것은 어딘가에 강박되어 있다는 것과도 통한다. 당연히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한국의 야구장은 경기가 8회 말 정도만 되면, 관중이 반으로 줄어 있다. 승패를 빨리 예단하고 빨리 빠져나간다. 영화관에서도 엔딩 자막의 스텝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다 기다려 주지 않고 나가는 사람이 많다. 한국사람 대부분은 사탕이나 얼음을 이빨로 깨물어 먹는다. 그러다 순간적인 치통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한다. 느긋이 기다리는 것을 못 참는다. 두고두고 음미하는 것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한국사람은 택시를 잡을 때 차도를 점령한다. 택시가 정차 위치를 이동하면 함께 따라 뛴다. 승객이 택시를 잡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택시가 승객을 잡아간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바쁘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강박으로 몰고 간다. 모든 강박은 자기를 스스로 옥죄이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한다. 그래서 강박은 어쩔 수 없이 중독의 성향을 지닌다. 오늘의 한국인은 이렇게 바쁜 것을 향하여 바쁘게 내몰리고, 바쁜 것에 의하여 더욱 바쁘게 마모되고 있다. 우리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또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살던 시대에 이런 조급의 강박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비판적 진단이 쏟아져 나와 있다. 오로지 결과만을 지향하여 과정에는 따뜻한 시선을 주려고 하지 않는 강력한 성과주의, 교육과 사회를 지배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 일등하지 않으면 이등은 의미 없다는 극단의 우월감이 만들어내는 열등감의 만연,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날카로운 이기주의 등이 그 원인 진단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속도라는 우상을 신봉하여 속도 이데올로기에 올라타면, 그만큼 내려오기가 쉽지 않은 탓일까. 속도의 강박에 휘둘리는 데서 이제는 속도를 강박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02
‘강박(强迫)’은 글자 뜻 그대로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강하게 압박하느냐에 따라 강박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나를 강박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강박은 ‘불합리하다고 자각하면서도 어떤 관념이나 행위에 사로잡혀 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남을 강박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강박은 ‘남의 뜻을 무리하게 내리누르거나 자신의 뜻에 억지로 따르게 하는 것’이 된다. ‘빨리빨리’를 중시할수록 강박도 커진다.

그러나 이 두 가지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서로 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강박한다고 했지만, 나를 강박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것은 ‘나의 밖’에 있다. 즉, 내가 나를 강박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이데올로기, 결과중심주의 등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이 나로 하여금 나를 강박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강박하는 경우도, 나와 남은 언제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다. 그를 강박하는 나는 그에게 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강박은 진정한 ‘나’를 앗아간다.

생각에 강박이 항상 따라붙는 것을 ‘강박 사고(强迫思考)’라고 한다. 흔한 예로 더러워지거나 오염되는 것을 늘 반복적으로 걱정하는 결벽증을 들 수 있다. 또 물건들이 제자리에 정확하게, 혹은 정해진 순서대로 놓여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가지는 것도 강박 사고의 일종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의 거룩함을 모독하거나 신에 대해서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는 것도 강박 사고이다. 이것이 병적으로 심해지면 ‘강박 장애(强迫障碍, Obsessive-Compulsive Disorder)’가 된다. 강박 장애는 어떤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떨쳐버리고 싶은데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 때나 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강박은 개인의 캐릭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 사회(문화)의 증후로도 나타난다. ‘빨리빨리’의 정서로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강박의 캐릭터를 가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강박의 인성이 마치 보편의 인성인 양, 그 사회 전체를 강박의 사회로 몰아가게 한다. 그렇게 강박증에 걸린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다시 ‘빨리빨리’를 강박하게 되는 것이다. 강박과 ‘빨리빨리’가 악순환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의 흐름 속에서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자유가 숨 쉴 수 없다. 기계적 능률은 있을지 모르나 지유가 피워내는 창의는 없다.

03
속도와 강박이 지배하는 삶에서는 성공과 실패가 이분법의 구조로만 존재한다. 이런 이분법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개인은 우월감과 열등감만으로 자기 정체를 가지게 된다. 우월감은 좋고 열등감은 나쁜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우월감과 열등감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 둘은 모두 ‘비교’라는 매우 천박한 감정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게 안 보이게 질투, 모멸, 저주, 자학 등의 감정을 늘 거느리고 다닌다.

오늘날 악성 댓글이 태어나는 숨은 기제가 여기에 있다.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그 우월감을 속물스럽게 증폭시키느라 자기도 모르게 실패자들의 열등감을 교묘하게 공략한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우월감 족속들을 대학살의 심리로, 그리고 작살의 언어로 난자한다.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도 열등감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들의 허점을 하이에나처럼 사냥하여 인터넷 댓글 공간에서 찢어발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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