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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ld Be’로부터의 탈출

‘Should Be’, 그것은 강력하고 굳센 것이다. 특히 교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Should Be’의 틀에 갇혀버리면, 유연하고 부드러운 힘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갖지 못한다. 선생의 존재를 좀 자유롭게 유지할 수는 없을까. 교사는 ‘Should Be’의 강박이 아닌, 자유가 주는 창의적 책임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01
오래 된 일이다. 1970년대 청년 교사 시절, 동네 대중목욕탕에서 우연히 제자들을 만나면 쑥스러웠다. 이런 낭패가 있나! 녀석을 피해서 구석을 찾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여러 번 있다. 아니 녀석들에게 부질없이 화가 나기도 했다. 그 무렵이야 모두가 궁색했으므로 너나없이 누구나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던 시절이다. 그러니 선생과 제자가 대중목욕탕에서 만날 가능성이 항시 있었다. 이를테면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불편하게만 느끼는 내게는 어떤 의식이 숨어 있는 것일까. 선생으로서의 권위와 체신이 깎여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은 마땅히 제자들 앞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체신과 풍모를 점잖게 지켜야 한다. 나는 전통적 사도 규범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내가 놀라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내 또래 동료 교사이었던 H의 태도이었다. 그는 체육교사이었다. 학생들과 운동장에서 함께 공을 차며 뛰고 달리다가, 그 녀석들을 데리고 아예 공중목욕탕을 함께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는 자랑처럼 이야기한다. 목욕탕 수도꼭지 라인에서 일렬종대(一列縱隊)로 앉아서, 등 밀어주기를 하면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등 밀어주기의 선두 자리에는 H 교사가 앉는다. 학생들과 함께 뛰는 체육교사이니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체육교사라고 모두 H 교사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만 그러했다. H 교사는 다른 장면에서도 무언가 자유로웠다. 적어도 나보다는 자유로웠다, 나는 죽다 깨어나도 생각하지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으로 학생들의 동기를 자극하고, 학생들과 함께 프로그램들을 실천했다. 더러 시행착오를 범하고 심심찮게 교장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의 자유로움이 더러 내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는 때로는 그가 ‘선생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만의 일방적 기준이었다. 그의 자유로움이 내게는 일종의 불안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가 선생의 체면을 구긴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진 ‘선생의 규범’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H 교사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호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의미 없는 인기’라 생각하였다. 그런 인기는 이른바 포퓰리즘(populism)에 영합하는 것이므로, 그런데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H에 비하면 나는 그냥 그저 그런 ‘전형적인 선생’이었다. 나는 내가 바른 교사의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선생이란 마땅히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들이 내 안에 많았다. 이 대부분은 전통적인 교사상을 주입받는 동안에 내 안에서 강직하게 강화되어 굳어진 것들이었다.

‘선생님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 굳이 영어로 옮기면 ‘Teachers should be~’의 구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Should Be’가 중요한 것이다. 나의 ‘Should Be’, 그것은 강력한 것이었고, 굳센 것이었다. 나의 ‘Should Be’는 아주 튼튼한 하드 프레임(Hard Frame)이 되어 교사인 나를 교사로 지탱시키는 힘이 되었다. 강력하고 굳센 것으로는 그만이다. 그런데 왠지 허전해지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결정적으로 모자라는 그 무엇이 있었다. 허전함과 결핍감,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이 내 ‘Should Be’의 굳셈과 강력함 때문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이었다.

02
카터 행정부 때 국무차관보와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지내고, 클린턴 행정부 때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로 미국의 외교정책 입안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지금은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는 조지프 나이(Joseph Samuel Nye, 1937~) 박사가 미국의 강점을 분석한 저서 를 썼다. 중국이 세계의 2대 강국으로 떠올라도 미국을 제치기는 어렵다는 주장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책이다.

그는 국력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서, 먼저 경제력과 군사력을 거론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가 세 번째로 강조하는 요소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이다. ‘부드러움의 힘’이라고 직역할 수 있겠다. 그는 국력을 강하게 하는 ‘소프트 파워’의 구체적인 예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호감을 주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 다른 나라에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대외정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든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의 힘 즉, 소프트 파워로 세계 100여 나라와 좋은 관계를 기지고 있음을 역설한다. 일본이 여러 국면에서 현대화를 이루고, 글로벌 수준의 대중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일본의 소프트 파워에 속하지만, 편협한 인종주의적 태도와 정책, 그리고 주변 나라들과 역사 왜곡을 하며 불화를 만드는 것을 문제로 지적한다. 일본의 소프트 파워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본다. 진정한 강국이 될 자격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중국 또한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해져도, 역사 문제, 영토 문제, 소수 민족 문제 등에서 소프트 파워를 보여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조지프 나이 교수는 강한 국가를 만드는 소프트 파워로서 ‘혁신 노력(innovation)’을 강조하는데, 나는 이 점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달라지고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가. 이 노력을 바로 소프트 파워의 핵심으로 보려고 한다. 부패와 퇴행을 막고, 정의와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조지프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90%는 미국의 민주적인 정부 시스템에 만족한다고 응답한다. 부패 때문에 미국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응답은 거의 ‘제로(0)’에 가깝다. 이것이 혁신 노력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2014년 혁신을 위한 각 분야의 연구 개발비(R&D)로 미국은 4,650억 달러를 썼다고 한다. 이는 전 세계 연구 개발비의 31%를 차지한다. 소프트 파워란 무엇인가. 부단히 새롭게 달라지고, 의미 있게 진화하기 위한 공동체 내의 물적 정신적 인프라쯤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프트 파워를 국가의 힘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에 필요한, 의미 있는 힘을 가진 개인이라면, 그에게 제도가 보장하는 권력, 이를테면 정치적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재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산업화 이전부터 있어 왔던 하드 파워(hard power) 쯤에 해당할 것이다. 개인의 소프트 파워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조지프 나이 교수의 논리를 빌려 온다면, 자아를 부단히 혁신(innovation)해 나가는 힘, 실제로 혁신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강력하고 굳센 하드 프레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혁신이 아니다. 아니, 그런 하드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굳게 경직된 상태로 강화되어 있는 것을 합리적으로 해체하려는 노력이 소프트 파워의 본질이 아닐까.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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