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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선정주의에 대한 명상

자꾸만 세상이 선정적이 되어간다.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더욱 자극적으로 감정에 부채질해댄다. 증오의 감정을 부채질하여 6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도, 관동대지진 때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일본도, 종족 간 전쟁으로 백만 명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했던 르완다도 모두 극단적 선정주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증오 감정이 부채질을 통해 점점 더 잔인하고, 점점 더 큰 규모의 학살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정성 또는 선정주의의 발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01
19세 이하 관람 금지 등급에 속하는 어떤 영화를 광고하는 표현 중에 ‘뼈와 살이 타는 밤’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섹스 행위의 적나라함과 격렬함을 암시하는 자극적 표현이다. 오죽하면 뼈도 타버리고 살도 타버린단 말인가. 너무 직접적이고 과장된 표현이어서 나는 다소 엽기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잘 승화된 에로티시즘의 미학에 감화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무지(無知)와 폭력의 분위기가 연상되어서, 혐오감 같은 것이 생겼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성(性)에 대한 호기심에 눈뜨는 청소년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까. 혐오감보다는 본능적 이끌림이 더 앞설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포스터 광고 사진(주로 버스나 지하철의 벽면에 붙여서 광고한다) 심사를 당국에서 했는데, 이 광고는 세 차례나 반려되었다. 이유는 지나치게 선정적(煽情的)이라는 것이다. 사연은 이러하다.

포스터 사진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김효진이 부드러운 시폰 소재를 입고 엉덩이 곡선을 드러낸 채 엉덩이를 고양이처럼 들고 있는 자세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것이다. 광고물심의위원회가 “김효진의 자세가 너무 야하다”고 지적해 퇴짜를 놓자, 영화사 측은 포스터에서 김효진의 엉덩이 부분을 잘라내 심의를 넣었으나 다시 반려됐다. 잘라낸 사진에서 김효진과 최지우의 등이 드러나 마치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영화사 측은 김효진의 어깨 부분이 드러난 사진을 심의에 넣었으나 겨드랑이가 드러나 역시 세 번째 퇴짜를 맞았다.

야한 영화를 선전하는 표현들이 이런 수준이다. 그걸 보는 우리는 민망하다. 민망하다는 것은 그걸 남과 함께 보았을 때, 같이 보는 사람을 대하기가 안쓰럽거나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안쓰럽다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 야한 광고를 그 사람과 함께 보고 있기에는 마음이 너무 언짢다는 것이다. 야한 영화를 선전하는 표현들은 마치 무슨 지령을 받은 것 같다. 사람들로 하여금 오로지 그 야한 영화에 빠져들도록 하는 데에만 초점을 둔다. 그래서 선정주의로 빠진다. 어떻게 하면 ‘야한 욕정(欲情)’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을 줄까. 그것도 보통 자극이 아닌, 강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 ‘야한 욕정’이란 그나마 점잖은 말이다. ‘야한 욕정’이란 섹스 욕구이다. 그것을 충동적으로 거칠게 마음에 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모두가 ‘선정성(煽情性)’ 또는 ‘선정주의(煽情主義)’에 해당한다. 참 나쁜 것이다.

‘선정성’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사람들의 감정이나 욕정을 자극하여 일으키는 어떤 성질’, 풀이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번에는 ‘선정주의(煽情主義)’란 말로 그 뜻을 찾아보았다. ‘사람들의 말초적 관심, 특히 육체적 쾌감을 자극하여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태도와 수법’이라고 되어 있다. ‘말초적’이라는 말이 수상쩍다. 이 말을 다시 사전에서 찾았다. 앞에 나온 ‘부분적이고 사소한’이라는 뜻은 ‘선정적’이라는 말과 잘 호응 되지 않는다. 이어서 ‘말초적’의 두 번째 뜻이 나온다. ‘성적 환상이나 육체적 욕망 따위를 불러일으키는’이란 뜻이란다. ‘말초적’을 이렇게 해석해야 ‘선정적’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선정성이나 선정주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02
그러나 사람들의 말과 마음 쓰임의 관계를 조금만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선정적이라는 말, 또는 선정주의라는 말을 꼭 성적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뜻으로만 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의 글자 그대로 뜻을 조금만 더 충실히 살려서 우리 언어생활을 반성하는 데 더 넓게 적용한다면 제법 아름다운 교양의 품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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