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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마법

01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이다. 3월 첫 주, 역사 시간이었다. 새 과목의 새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 앞에 나타나신 선생님은 당신의 이름을 칠판에다 크게 쓰셨다. ‘김유해(金有海)!’ 그리고는 우리더러 한 자씩 띄어서 ‘김·유·해’라고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그 이름 옆에 자신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써서 소개했다. 그 두 번째 이름은 ‘백민(白民)’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를테면 선생님의 아호(雅號)인 셈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뒤따랐다. 간략하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던 설명이었다.

“백민(白民)! 이 이름에 어떤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나? 사전을 찾아보면 ‘아무 벼슬이 없는 백성’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지. 그러니까 일반 평민을 백민이라고 하는거야. 그런가 하면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백의민족을 줄여서 ‘백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내가 너희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우리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과 백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이 ‘백민’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저런 뜻이 두루 들어 있는 이름이다. 이 이름과 함께 역사 선생인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의 아호 설명은 나에게 산뜻하고 강렬한 느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아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아호는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이나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처럼 저렇게 젊은 분도 아호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선생님은 서른 살 내외의 젊은 나이였다. 또 아호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나 가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선생님처럼 평범한 분도 가질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평범한 백성이란 뜻의 ‘백민(白民)’을 아호로 삼은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하나는 아호 속에 담긴 선생님의 진지한 자아의식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역사를 탐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렇게 이름으로 천명하고, 그것을 진정성 있게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어린 나에게 감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름이란 작명의 동기와 그 사용 맥락이 어떠한지에 따라 참으로 묘한 매력을 드러낸다. 학생들과 처음 대면하는 역사 교실에서 당신의 아호를 진정성 있게 소개해 주신 선생님이 나는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냥 인상이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선생님 내면의 정렬함이 오롯이 나를 감싸고도는 듯했다. 선생님은 그냥 당신의 아호를 간략하게 소개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이름으로부터 적지 아니한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받은 셈이었다.

역사에서 정치적 사건들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일반 평민들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 풍속의 역사를 읽는 재미를 터득하였다. 또 역사와 나란히 가는 우리 백의민족에 대한 의식이 각별히 살아났다. 특히 문화사나 정신사를 배울 때 더욱 그러하였다. ‘백민(白民)’이란 아호에는 어쩌면 역사를 전공하여 가르치는 선생님의 민족의식, 민주의식, 그리고 그의 국학정신 등등 그 모든 것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설명을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백민’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그런 심지를 초월적으로 전해주며 다가온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02
본명 이외에 또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우리 전통사회, 특히 선비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문화였다. 원래 우리는 이름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있어서, 그것이 훼손되는 것을 피하였다. 특히 서열 의식이 심했던 근대 이전에는 아랫사람이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는 것을 삼갔다. 글을 지을 때도 왕의 이름에 들어 있는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 이름을 지을 때도 조상의 이름자에 든 글자는 애써 기피하였던 것이 그러한 예들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통념적으로 본명이 쉽게 아무나 아무렇게나 불리는 것을 피해 가는 지혜로 아호를 지어서 편하게 사용하는 관습이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문화를 낡은 것으로만 치부할 이유는 없다. 이름을 여러 개 가지는 것이 현대사회의 삶의 생태에 비추어 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관계가 여러 방향으로 생겨나고, 소통이 훨씬 더 다양해짐에 따라, 발신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한 가지 이상으로 요구될 때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맞추어 필요한 이름들을 새롭게 만들고, 그 이름으로 소통의 질과 양을 더욱 알차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여기저기 보인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태명(胎名)을 지어 준다. 이는 이름 자체보다도 태교를 더욱 뜻깊게 하려는 데서 생겨난 신풍속이라 할 수 있다.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소통을 위해 어떤 공동체에 가입할 때 사용하는 소위 아이디(ID)라는 것도 이름의 일종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이디를 정할 때도 자신의 내면 정체성을 잘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내가 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내 삶의 실천을 어떻게 하겠다는 도전과 의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디는 인터넷 사용의 도구이므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냥 기능적으로만 쓸 수 있으면 그만이다. 머리 아프게 의미 따지지 말자.” 매양 이렇게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사람됨과 정체성 자체도 “의미를 따지면 귀찮다. 그냥 대충 편하게 때우자.” 이렇게 굳어질 수 있다. 정말 이런 성격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른바 이름의 마법이란 것이 있다. 이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 이름의 의미 쪽으로 몰고 가도록 최면을 건다. 골몰하여 뜻을 헤아리게 되는 이름 짓기는 나의 자아가 발달하고 나의 정체성이 확장되는 시간이다. 본명은 물론이고, 아호도, 닉네임도, 아이디도 모두 그러하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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