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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취급 받았던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남부 도시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궁(Esterha zy Palace)은 하이든 유적지 중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하이든이 섬기던 니콜라우스 공작은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곳에서 가까운 노이지들러 호수(Neusiedlersee) 동쪽(현재 헝가리의 서쪽 끝 국경 근처)에 여름 별궁을 지었다. 공작은 1766년 여름 내내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이 계획은 공작 혼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궁정 악단을 포함한 궁정 전체를 대동하고 장소만을 옮기는 것이었다.


여름 별궁은 간척된 습지대 한복판에 위치했다. 공작은 야심찬 관개 작업을 펼쳤고, 1760년대 중반부터 1784년까지 1,300만 굴덴(Gulden)이라는 엄청난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 126개의 방, 미술관, 각기 용도가 다른 오페라극장 2곳, 당구대가 설치된 커피하우스 등이 갖춰진 화려한 3층짜리 궁전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장엄한 전망을 가진 정원과 조각상, 분수, 신전이 있는 넓은 공원이 있었다. 이런 시설들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궁전뿐이다. 이 궁전은 베르사이유 궁전과 가장 비슷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식의 건물로 흔히 에스텔하지라고 불린다.


집에 가고픈 하이든의 기지가 만든 <고별 교향곡>
에스텔하지는 원래 여름 궁전으로 쓰려고 지어졌지만, 공작은 이곳에서 2월부터 11월까지 머무르게 된다. 여름이 한참 지난 뒤에도 머물게 되자 가족을 아이젠슈타트에 남기고 온 음악가들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일자리를 잃거나 월급이 줄어들까 하여 노골적인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음악가들은 하이든에게 이런 장기 유배 생활을 끝낼 방법을 찾아주길 원했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공작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전할 방법을 궁리한 끝에 <교향곡 제45번 ‘고별’>을 작곡했다.


당시의 교향곡은 종결부를 활기가 넘치게 작곡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고별 교향곡>은 특이하게 F# 단조로 설정되어 아다지오로 끝나는데, 각 악기가 차례로 소리를 내지 않게 된다. 각 연주자는 자기 파트의 연주가 끝나면 보면대 위의 촛불을 차례로 끄고 악기를 들고나가도록 미리 계획을 세웠다. 이 즉흥적인 이벤트는 시위이기 이전에 사랑의 교감이었다. 촛불이 모두 꺼지자 이 연주의 의미를 알아차린 공작은 “이들이 모두 떠난다면 우리도 떠나야겠군”이라고 말하고 전원 휴가를 선언한다.


하이든과 음악가들은 니콜라우스 공작의 성명 축일인 1772년 12월 6일 아이젠슈타트로 돌아왔다. 하이든은 그날의 예배를 위해 아주 멋진 새 미사곡을 준비했다. 이 성 니콜라이 미사(Missa Sancti Nicolai)는 아마도 공작이 <고별 교향곡>을 이해심 있게 받아들여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교향곡을 다작할 수 밖에 없었던 하이든’
<고별 교향곡> 에피소드는 봉건사회에서 음악가의 실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음악가들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는 1761년 5월 19일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가(家)의 부궁정 악장으로 취임하면서 서명한 계약서를 보면 더 잘 알 수가 있다.


계약서 제2항에서는 ‘하이든은 하인으로 취급되며 또 인정받는다. 단원 모두는 규정에 따라 깨끗한 옷차림을 갖추어야 한다’고 되어있다(반드시 흰색 양말을 신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가발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이 항목에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음). 또 제4항은 ‘하이든은 영주가 부탁한 곡만 작곡할 의무를 지닌다. 작품의 무단 양도는 불허하며 영주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작곡할 수 없다’고 명시돼있다. 이어 제5항, 매일 점심식사 전후에 영주가 그날 저녁에 연주를 듣고 싶은지 확인하고 단원에게 연락한다. 제7항, 모든 악기와 악보를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개인 소유의 악기가 없었음). 제11항, 연봉은 400 플로린(Florin)이고 연 4회에 나누어 지급한다. 제12항, 부악장은 직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하루에 식대로 반 굴덴을 받는다. 제14항, 영주는 계약기간 중 부악장의 근무를 보증하고, 영주가 판단해 만족할 만한 근무가 될 때 악장으로 승진될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


이 계약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방적인 계약이었다. 하지만 안정된 자리를 얻은 하이든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많은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하이든의 연로한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제복을 입은 것을 보고, 또 공작이 아들의 재능에 감동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


에스테르하지가(家)에서 작곡된 하이든의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교향곡 <제8번>부터 <제92번>까지 85곡, 현악4중주 36곡, 피아노 소나타 17곡, 미사 5곡, 오라토리오 2곡, 그리고 15편의 오페라가 모두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이 독창적인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진 것은 어찌 보면 계약서의 4항에 의해 다분히 관습적이거나 반강제적으로 반드시 새 곡을 들고 영주 앞에 서야 하는 하이든의 삶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하이든은 29세에 에스테르하지 가문과 처음 계약할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을 30여 년에 걸쳐 한 걸음씩 해냈다. 20대 후반에야 첫 교향곡을 작곡한 하이든이 훗날 자신이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릴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산 젊은 시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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