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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오월 어느 날에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오동꽃이 산기슭에 두둥실 피어나는 오월의 어느 날입니다. 들판에는 청보리의 물결이 싱그럽고 향기롭습니다. 이맘 때를 옛어른들은 춘궁기라고 합니다. 얼굴에 버즘이 꽃처럼 피어난 아이들이 쑥과 달래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고 찔레 순을 벗겨 달큰한 맛으로 배고픔을 잊었겠지요. 사월을 장식하던 분홍과 노랑의 아름다운 꽃들이 가뭇없이 사라진 오월이면 서늘한 색감의 꽃들이 사위를 메웁니다. 수북한 쌀밥 같은 이팝나무, 포도송이처럼 탐스러운 등꽃, 달콤한 향내의 수수꽃다리 그리고 모란과 작약은 황홀한 꽃보라색으로 계절의 여왕이 됩니다.


이런 날 오후에는 저도 가만히 혼자 앉아 웃고 싶습니다. 수도승처럼 글을 읽고 쓰는 장석주 시인의 신간을 서점에서 샀습니다. 탁월한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수없는 서평을 생산하던 그가 어느 날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가 칩거하며 글을 씁니다. 안성의 수졸재에서 침잠하며 지낸 삶의 오후 이야기는 수려한 문체와 깊이 있는 내용으로 온종일 그의 책을 놓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다는 것은 지각 작용의 시작입니다. 이 북유럽의 나라에서는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가면 홀연 아름다운 공원이 나오고 파란 호수가 나타납니다. 풍경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이런 장소의 펼쳐짐이고, 우리는 그 장소의 펼쳐짐에 눈을 빼앗깁니다. 풍경이 건네는 것은 그 물질적 외관의 아름다움보다는 드물게 만나는 정적과 사색의 순간이지요. 풍경은 외부의 것으로 엄연하지만 내 안에 들어와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하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보는 것은 물질로 빚어진 외관입니다. 그 장소란 시간과 포개진 그 무엇입니다. 장소가 펼쳐내는 공간의 무한함은 시간을 삼키고 다시 내뱉으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풍경은 시간의 유동성에 의한 추격과 변화를 떠아나으며 만들어진 총체인 것이니까요. 풍경은 응고된 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즉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결과를 반영하는 상()입니다. P 23~24

 

그 책을 읽으며 걷기를 좋아하고 황홀하게 책을 읽으며 깊은 사색을 사랑하는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그는 끝없이 옛사람과 대화하고 세상의 풍경에 말을 걸고 아름다운 것에 전율하는 타고난 시인입니다. 산이 자지러지게 푸른 오월에는 꽃구경보다는 푸른 숲이 보이는 숲속에서 그처럼 멋지게 고전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책 읽기 좋을 때란 딱히 정해진 바가 없다. 날이 서늘하든 따뜻하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좋은 책만 있다면 언제라도 책 읽기에 좋은 때다. 반면 걷기는 분명 맞춤한 때가 있다. 걸으려면 먼저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한다.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폭풍이 올 때는 분명 좋지 않다. 날이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나 벚꽃들이 하르르 지는 봄밤이나 은하수가 흐르는 가을밤이 걷기에 좋다.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보고, 당신이 들은 것을 나도 듣는다. 우리는 풍경이 베푸는 지복들, 빛과 어둠, 비와 바람, 나무들의 아름다움과 위엄, 공기중의 방향들, 오만 가지의 크고 작은 소리들, 계절의 순환이 일으키는 멜랑콜리한 감정들을 함께 나누며 걷기라는 행위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P 240

 

며칠 전 잠시 도시의 한 가운데 있는 작은 절집엘 다녀왔습니다. 초파일 즈음이어서 어두운 절집 위로 등불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을 밝히는 그 등불들 하나하나마다 작은 이름들이 달려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소원과 간절한 바램이 둥실둥실 피어나는 풍경을 절 마당에서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종교를 떠난 간절한 바램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글 한 구절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저 대지에 드리운 어둠은 불을 켜라는 신호다. 밤은 불을 켜는 시각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마음에 등불을 켜주는 그런 오월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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