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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어떤 소설가는 젊은 시절에 유명한 사람의 음악을 듣고 음악가 꿈을 꾸었다. 꿈꾼 그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꿈 가까이 접근해 간 것이다. 이문세의 '별밤'을 듣고, 정은임의 '영화 음악'과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었던 경험은 그를 심야 라디오 방송 디제이가 되게 만들었다. 어느덧 꿈을 꾼 지 20년이 훌쩍 넘어 지금은 새벽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가 됐다. 하지만 나의 삶은 어떤가? 내가 태어나 자란 5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 시절은 솔직히 꿈이 없었다. 청년시절도 먹고 생존하는 것이 전부였던 삶이 아니었던가!

 

나는 6.25 전쟁 중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집을 잃고 남의 집 셋방에서 살았기에 주변에는 셋방 집 주변의 사람들이 눈에 처음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일상으로 비치는 농촌의 풍경 속에 자랐다.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농사일이 힘든 일인가도 알게 되었다. 점차 성장해 가면서도 직접 가정 일을 돌보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이 과정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 당시 깨인 머리를 가지신 부모님 덕분에 교대를 진학하여 공부를 마치고 교직에 첫발을 딛은 것이 1973년 4월이었다. 첫 발령지인 나로도에서의 추억도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다. 이후 2015년 8월 말까지 43여년 간 학교를 중심으로 여행지를 바꿔가면서 살았던 1막의 인생이 아무 탈없이 완주를 한 것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 가야 할 퇴임 이후 인생을 위한 꿈을 내가 꾸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다. 새로운 출발 준비를 위해2015년 5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주관하는 퇴직 예정 공무원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인생 2막을 위한 꿈꾸는 과정이었다. 풍광 좋은 수안보호텔에서의 4박 5일 연수는 '미래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첫 강사님은 "정년은 삶의 끝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되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가장 잘 하는 것을 하라"고 강조했다. 이 기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솔직히 긴 공직생활 동안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바쁘기 그지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내가 하고 싶기 보다는 매뉴얼이 정한 일을 나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퇴임식을 마치고 마지막 학교에서 나오는 기분은 시원하였고 어깨가 가벼우어졌다.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다.

 

감사한 것은 지금의 내가 여러 곳을 거치면서 살아 온 그때의 나를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내 평생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직업을 거쳤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교사, 중학교 역사교사를 하면서 외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한 인연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교원 연수 유학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나의 삶의 바탕이 된 것이다. 근무지를 바꿔보기 위해 서울에서 교육정책연구소 연구원 3년의 생활, 그리고 해외 파견 교사로 5년을 경험하면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다시 교사로 복직했고, 다시 꿈을 꾸어 1999년 9월부터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교육전문직의 길을 걸었다. 이런 과정에서 꿈꾸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한국교원대 정책대학원에 진학하는 행운도 가졌다. 이후 누구의 말처럼 해외 파견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내 몸에 익힌 것이 외국어를 바탕으로 주일 한국교육원 원장에 파견돼 4년을 근무했다. 


특히 이 기간중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느라 혼신을 다한 노력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한이 있는 법이다. 파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농촌에 있는 고등학교 교감 자리로 갔다. 곧 교장연수를 마치고 바로 2000년 9월 공모 교장의 길을 걸었다. 학생 수가 천여 명이 넘는 대규모 학교라서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교장 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8월 말까지는 정해진 직장 속에서 살았지만 9월 1일 부터는 나 홀로 출발하는 출발선에 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제는 나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운명 앞에 선 것이다. 언제까지 살아야 할런지 기약이 없는 기나긴 2막 인생을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정답이 없다. 단지 내가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삶이란 것을  피부로 절감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내가 스스로 기획하고 세상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하는 과정에서 '내가 하던 것을 가장 잘 할 수 있고, 현직과 연결되는 것을 잘 할 수 있다'는 연수 강사의 조언을 따라 중학교 자유학기제 실시에 따른 학교의 요구는 나를 필요로 했다.

 

퇴직을 해 모든 일상에서 학교를 떠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현장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2학기부터 '일본 문화 수업' 강사로 아이들 앞에 다시 선 것이다. 10년이 넘는 일본 생활과 일본어 구사능력은 내가 갖고 있는 자산이다. 이를 후세들과 나누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 간 것이다. 이제는 교장이 아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에게 교장 선생님이라 부르면 나는 학교에 교장 선생님은 한 분이니 나는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불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옛 나를 부르던 교장 명칭을 버렸다. 2막 인생의 출발은 이렇게 1막의 연속 선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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