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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그리고 백설공주

김정금의 옛날 옛날이야기

구전 민담과 설화들이 채록되고 묶여 지금의 동화가 되었다면 신화는 조금 다르다. 오래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해졌다는 전승의 역사는 조금 비슷할 수 있지만, 굳이 동화와 신화로 구분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목적성이다. 누구에게 읽히는가?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 목적성에 의해 동화와 신화는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능하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도 다르다.


보통 애써서 역사적 연원을 밝히려는 것이 신화라면 동화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갖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동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아주 오랜 옛날에 어느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화를 듣고 읽는 아이들이 겪는 다양한 심리적 불안과 고통,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착각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동화 내용을 자신의 문제로 동일시하는 심리적 역동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진짜 자신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어느 마을, 어느 아이의 문제라면 성장 과정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문제를 ‘자기화’하는 곤란을 겪을 수 있게 된다. 즉,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더 깊게 한다(동화를 다루는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아동소설’과 ‘창작동화’에 대해 몇 가지 우려를 표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호에서 살펴본 남아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동화들은 아이들이 보다 ‘안전한 장치’인 옛이야기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비밀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소재들이라 하겠다. 그럼 이번에는 여아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한번 살펴보자.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아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들도 비슷한 방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전(前) 오이디푸스 단계(소녀는 소년이다)
이때의 여자아이들은 성별에 대한 구분이 분명치 않다. 그래서 막연히 자신을 남자아이로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심리적 흐름의 과정을 거친다.
나는 네살이고 클리토리스의 흥분을 느낀다. → 나는 이것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며 또 그것의 전지전능한 힘을 느낀다. → 남자아이들처럼 나는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다.


● 고독의 단계(혼자이며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여아)
완전히 벗은 작은 남자아이를 보고 난 뒤 나는 내게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것의 박탈로 인해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 나는 엄마도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나는 엄마가 나를 이렇게 낳아준 것에 대해 엄마를 비난하면서도 우리가 예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더구나 엄마는 그것을 속였다. → 나는 화가 나서 엄마를 떠난다. → 지금 나는 혼자이고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지며 내 자존감은 상처를 입었다. → 나는 남자아이들을 질투한다.


● 오이디푸스 단계(아빠를 욕망하는 소녀)
나는 이제 그 강하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무엇’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는 내 아버지로 향한다. → 여전한 질투와 부러움을 안고 나는 아버지에게 내게도 그것을 줄 수 없냐고 묻는다. → 아버지는 내게 주는 것을 거절한다. → 나는 내가 결코 그것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 나는 아버지에게 나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한다. → (그것을 갖고 싶은) 나의 부러움은 욕망으로 바뀐다(욕망이 돼 버린다). → 나는 더 이상 내 아버지의 ‘그 강한 무엇’을 갖기를 원치 않고 ‘그것’이 되기를 소망한다. → 그때, 나는 여성성의 모델로서 어머니의 정체감을 형성한다. → 나는 내 어머니에게 소속되기를 소망한다.


● 오이디푸스의 해법(남성을 갈망하는 여인)
나의 아버지는 거절한다. → 나는 아버지를(아버지라는 존재를) 나로부터 ‘탈성화’하며, ‘인간’으로서 그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 점차로 나는 여성이 돼가며, 남성을 사랑하게 된다. → 나는 더 이상 상상 속의 ‘그 무엇’과 ‘내 것’, ‘내 자궁’, 내 파트너의 아이를 희망하는 욕구를 인내하거나 괜한 ‘성별에 대한 싸움’을 계속하지 않는다.


이 부분 역시 다시 한 번 풀어보자. 이제 막 네 살이 된 여자아이가 있다. 아이는 목욕을 할 때였는지, ‘쉬~’를 할 때였는지 모르나 우연히 자신의 클리토리스에 가해지는 묘한 느낌을 경험한다. 이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무언가 큰 기쁨을 주는 이것이 페니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또 남자아이처럼 그것의 전지전능한 힘을 느낀다 . 이 시기에 아이는 남자아이들처럼 자신도 어머니를 소유하고 싶다는 판타즘(phantasm)을 경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자기 또래 남자아이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자기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그 남자아이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아이는 ‘그 놀라운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에 대해 깊은 박탈감과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고통스럽다. 이어 아이는 자기의 어머니에게도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요?”라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원래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여자아이는 자신을 속인 어머니에게 너무도 화가 나 결국 그 어머니를 떠난다. 이 순간 아이는 너무도 깊은 외로움에 빠지며 부끄러움과 깊은 자존감의 손상을 경험한다 .


결국 아이는 반대편에 있는, ‘그것’을 ‘당당히’가지고 있는 ‘저 아이들’ 곧, 남자아이들을 질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누구보다 강하게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말한다. “아버지 내게도 그것을 주세요.” 이때 아버지의 1차 거절이 있게 된다.  결국 아이는 그것을 갖고 싶은 부러움을 욕망으로 바꾸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2차 거절. 결국 그것을 가질 수도, 그것을 가진 아버지를 내 것으로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는 서서히 이름하여 부모를 향한 ‘탈성화’를 경험해 나간다. 또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사랑을 다른 남성에게로 옮겨 간다.  이제 여인이 된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또 한 명의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동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아 중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여아에 대한 구체적 심리 변화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여아들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역동적인 심리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처음엔 남아와 똑같이 ‘어머니로 향하는’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아라서 무조건 시작부터 아버지에게로 성적 역동의 경험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화 속에서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렇게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이 기간에 여자아이들이 느끼는 막연한 공포, 불안, 설렘, 기대 등을 다루는 데는 충분하다. 그 대표적 작품은 역시 백설공주이다.


백설공주는 특히 프로이트가 명명한 ‘가족 로맨스’라는 단어에 딱 맞는 어머니-아버지-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역시 어머니의 두 얼굴, ‘친모-계모’의 모습을 통해 성장하는 딸과 그 딸을 바라보고 때로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어머니의 심리를 잘 다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어머니(계모-왕비)의 질투 어린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부지불식간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진짜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원망과 두려움을 ‘새엄마니까’라는 위안으로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백설공주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인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소포클래스의 작품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고 구해주는 목동과 같은 위치를 갖는 인물로 아이를 죽일 수도 구할 수도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백설공주를 죽이고 그 심장을 가져오라는 왕비의 명령을 어기고 사냥꾼은 백설공주를 그냥 숲속에 ‘버려둔다’. 그러고는 다른 동물의 심장을 왕비에게 가져간다. 여기서 ‘버려둔다'는 의미가 바로 오이디푸스적인 가족 로맨스 상황에서 수동적인 아버지(또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아버지)를 뜻하며 상대적으로 더 강하고 큰 영향력을 가진 왕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실제로 아이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구체적 생활에서는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온다).


백설공주에서는 또 ‘빨간색’이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하는데 처음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붉은’ 아이를 꿈꾸는 백설공주의 친모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자라는 공주, 이후 계모에 의해 전달되는 빨간 사과 등이 그것이다. 이 ‘빨간색’은 매우 강한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보통은 여자아이가 겪게 되는 성장과 초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빨간색’ 외에도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레이스띠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느 날 장사치로 분한 왕비는 백설공주를 찾아와 레이스띠를 보여주는데 백설공주는 한눈에 반한다(‘레이스’라는 소재가 담고 있는 여성성, 이제 막 여성에 눈뜨는 백설공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비의 백설공주 허리 조르기. 동화는 백설공주의 허리를 레이스띠로 졸라매 죽이려는 계모(왕비)의 모습을 통해 오이디푸스적인 갈등 속에 있는 어머니와 딸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는데, 성적으로 성숙하려는 딸의 모습을 거세시키는 어머니, 성장을 방해하는 어머니 등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여아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다루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미녀와 야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구전된 동화는 아니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아버지-딸-야수의 삼자 관계를 통해콤 플렉스를 극복하고 한 명의 온전한 ‘여인’으로 탈바꿈하는 주인공을 보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아버지를 떠나야만 비로소 ‘아버지 외의 남성’을 온전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이며, 아버지와의 관계가 이어지는 한 그는 여전히 ‘야수’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렵고 무서운 이 ‘야수’나 괴물은 많은 동화들 속에서 등장하는데, 아직 성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성을 의미하며 그가 주인공의 ‘진짜 남자’로 받아들여질 때 드디어 한 명의 온전한 사람(남자)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이 ‘미녀와 야수’에서는 아버지와의 밀착된 관계, 그 관계의 벗어남 등이 어떤 동화보다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의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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