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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대한제국의 꿈, 종말의 숨결 깃든 덕수궁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성정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가 통합해 그해 가을 출범했다. 임시정부는 국호를 놓고 ‘대한’과 ‘조선’, ‘고려’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대한’을 택했다. 그 이유는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나라가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니 그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 들어설 나라는 ‘제국’이 아니라 시민이 중심이 되는 ‘민국’이어야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공식 국호로 결정한 것이다.
 
올해는 대한제국이 수립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대한제국의 이미지는 희미해졌지만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

대한제국의 중심, 경운궁(덕수궁)

1896년,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이다. 그 후 경운궁을 살펴보라 했고 곧 대대적인 궁궐 조영이 시작됐다. 그리고 만 1년이 지났을 무렵, 고종은 지금 우리가 덕수궁으로도 부르는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환궁’의 뜻이 궁궐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틀린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원래 머물던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간 것이 아니니 맞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왜 고종은 이들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창덕궁에서 겪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그리고 경복궁에서 겪은 경복궁쿠데타(1894)와 을미사변(1895)의 충격 때문이리라.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역사의 몫이지만 고종으로서는 방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관파천 당시 경운궁은 궁궐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경운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환도한 뒤 머물던 정릉동행궁이다. 광해군 때 경운궁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인조가 반정에 성공하자 왕이 머물렀던 건물 두어 채를 빼놓고 그 밖의 건물들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그런 경운궁 옆에 1883년 미국공사관이 들어선 이래 영국과 독일, 러시아도 근처에 외교관을 설치했다. 
 
궁궐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경운궁은 그 해 가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리고 2년 뒤인 1899년, 불평등의 상징이었던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대등하게 맺으며 적어도 외교적으로 대한제국은 주변 나라에 견줘 부족함이 없게 됐다.  고종은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위상에 어울리는 궁궐의 모습을 갖추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02년에는 중층의 중화전까지 들어섰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궁궐이 되다

경운궁(덕수궁)에 가면 여느 궁궐과 다른 광경을 보게 된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 궁궐 건축물과 함께 석조전, 정관헌과 같은 서양식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런 조합을 전통 궁궐의 ‘오염’으로 표현하지만 적어도 고종의 뜻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황제가 된 고종은 개혁의 이념으로 ‘구본신참’을 내세웠다. 그러니 궁궐도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지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운궁은 120여 년 전, 대한제국의 희망과 고민을 담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석조전과 프랑스풍으로 표현한 정원. 러시아 사람 사바찐이 설계한 정관헌과 중명전 등은 당시 대한제국의 관심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무엇보다 고종의 관심은 외교였다. 경운궁을 공사관 사이에 지은 것은 소극적으로 보면 신변의 안전을 구하는 방책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보면 외교를 통해 대한제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뜻이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도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1902년 수민원을 세워 첫 공식 이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와이 이민을 시작하기도 했다. 몇 해 동안의 흉년에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을 구하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이전과 시야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외교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사건은 아관파천 시절 민영환 일행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첫 세계 일주를 한 민영환 일행은 고종에게 큰 자극이 됐을 것이다. 
 
그의 노력은 1904년 위기를 맞는다. 러일전쟁 때문이다. 전쟁 직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압력으로 공수동맹을 맺어야 했다. 더구나 그해 4월, 경운궁에 큰 불이 나면서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지금 덕수궁의 모습은 1906년까지 복구한 모습이다. 고종은 다시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대한제국 외교의 종말, 중명전

 중명전은 정동극장 뒤에 있는데 지금은 경운궁 밖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경운궁 영역이었다. 지금과 달리 경운궁은 중화전과 석조전 말고도 중명전과 선원전 영역이 더 있었다. 하지만 중명전과 선원전은 고종 승하 이후 외부에 팔려 개인 사무실이 되거나 학교가 들어섰다. 중명전처럼 원래 모습을 찾은 곳도 있지만 아직 그렇지 못한 영역이 훨씬 더 넓다.
 
불이 난 경운궁을 복구하는 동안 고종은 중명전에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서 을사늑약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끝나며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는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896년 이후 대한제국이 의지했던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을사늑약을 강제했고 여기에 동조한 을사5적이 서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을사늑약은 고종이 승인하지 않았고 이름도 없으니 무효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이 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외교로 이루려던 고종의 대한제국 존립 계획은 일본의 무력 앞에 뿌리까지 뽑힌 것이다.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지금까지 ‘경운궁’이라 불렀던 덕수궁. 언제부터 ‘덕수궁’이 됐을까. 1907년, 고종은 대한제국 외교 부활을 위한 마지막 계획을 펼쳤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는 것이다. 특사단의 활동으로 대한제국의 현실을 알리는데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외교 부활이라는 고종의 마지막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대한제국이 스스로 원해 ‘을사늑약’을 맺었다고 주장한 일본 역시 체면을 크게 상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세 명의 특사에 대해 궐석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고종에게는 협박과 위계를 통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도록 했다. 

졸지에 황제가 된 순종은 고종에게 오래 건강하시라는 뜻으로 ‘덕수’란 궁호를 올렸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고종이 여전히 경운궁을 고집하자 순종은 창덕궁에 머무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러자 경운궁과 거기에 머무는 ‘덕수궁’, 곧 고종을 칭하는 이름이 혼재됐고 어느 순간 경운궁보다 덕수궁이 익숙해졌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경운궁이 곧 덕수궁이었고 덕수궁은 곧 고종이었으며 고종은 곧 대한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해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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