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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17교단수기 은상] 아보가드로와 아버지


전화가 걸려왔다. 똑똑해진 전화기는 벨 소리와 함께 상대가 누구라는 것까지 알려준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전화는 모른척하기도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부지, 접니더. 동귭니더.”

군 복무 중에 휴가 나왔다며 군기든 목소리가 씩씩하다. 그날 저녁을 함께 했다. 

몇 해 전 담임했던 녀석이다. 유난히 속을 썩였던지라 금방 기억이 난다. 무단결석과 조퇴를 자주 했지만 성적은 상위권을 돌아 포기하기 아까워 아들처럼 돌봐줬던 아이였다. 마주 앉아 대학 원서를 쓸 때 애먹여서 죄송하다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포기하지 않고 잡아준 선생님 덕분에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공학도가 되고 싶다며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던 아이다. 제대 후 열심히 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말에 사십 년도 더 지난 나의 고교 시절이 제자의 목소리에 겹쳐진다. 

세상을 딛고 선 다리에 힘이 가득하던 때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갔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야생마 같은 우리를 바라보던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미지근한 물을 마신 듯 덤덤했다. 칠판 한가운데 이름 석 자와 ‘화학’이라는 짧은 글을 써 놓고 낮게 입을 열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훗날 내 모습이 될 줄은 모른 채 그렇게 선생님을 만나면서 나의 고교 시절은 시작됐다. 

항상 수수한 차림이었다. 크게 화를 내지도, 유별스럽게 칭찬을 하지도 않았지만 선생님한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언제나 색색의 분필 몇 개를 들고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수업을 하곤 했다.  

우리는 선생님을 이름 대신 ‘아보가드로’라고 불렀다. ‘같은 온도와 압력에서는 같은 부피 속에 같은 입자를 가진다’는 화학 법칙처럼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과 말투, 옷차림이 아보가드로의 법칙같이 느껴졌다.   높낮이 없는 어조의 설명이지만 특유의 수업 분위기는 단호하고 열정적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수업에 몰두했다. 마치는 종이 울리면 그제야 ‘숨이 막혔다,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며 서로서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수업 시간에 제시된 문제를 잘 풀었을 때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잘 했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라며 투박해 보이는 손으로 등을 다독여 주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다른 과목은 뒤로 밀고 화학 공부를 시작했다. 가볍게 등을 다독이는 느낌을 자꾸 느끼고 싶었다. 벼락처럼 날아든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에 온통 짙은 회색 빛깔이던, 흔들리던 나를 그렇게 위로해 준 시간이었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새 학기가 시작됐다. 든든히 준비를 마친 선수처럼 질문에 대답할 많은 것을 공부한 나는 화학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방학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보가드로 선생님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몇몇 아이들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달랐다. 선생님이 지나 다닐 것 같은 복도로 자꾸만 눈이 갔다. 다른 학교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한 동안 나는 선생님을 기다렸지만 선생님을 찾아보지는 못했다. 선생님의 부재를 확인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지겹다고 했던 친구들 입에서도 ‘아보가드로 선생님이 보고 싶다’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딱딱하고 지루한 듯 했지만 우리들 마음에 또렷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결심했다. 나도 교사가돼 선생님처럼 해야겠다고. 그때부터 다른 과목도 열심히 했고 화학은 더 몰두했다. 선생님이 늘 지켜보는 듯 공부가 즐거웠다. 3학년 때는 이과 반에서 손꼽힐 만큼 성적이 향상됐다. 

‘아보가드로’의 꿈을 가지고 화학을 선택했지만 졸업 후엔 일반 회사에 입사했다. 교사의 꿈은 잠시 잊히는 듯했다. 전공과 상관없는 영업을 해야 하는 신입사원의 업무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래도 교사가 나의 숙명 같은 것이었을까. 편치 않은 시간 속에 어느 날 사립학교 교사 채용시험을 알리는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이 웃으며 내 등을 다독이는 듯 했다. 그 길로 교단에 서게 됐다.

나의 교직 생활은 열정과 순수함으로 시작됐다. 바르고 잘 사는 아이들보다 뒷전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가정방문이 있을 때면 주머니를 털어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생필품을 사 가곤 했다. 
 어느 날 부모 없이 애를 먹이던 한 녀석이 맹장염으로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며칠 동안 퇴근 후 병문안을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려는데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아버지 같은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회복 후 학교로 돌아온 녀석은 나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 둘 따라 부른다. 서로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내가 아보가드로 선생님에게서 느꼈을 사랑을 이 아이들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명치끝이 아릿하며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묻어두고 있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보람과 함께 밀려온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잘 자란 자식 같은 졸업생들이 찾아오곤 한다. 같이 늙어가는 머리 희끗한 아이들이나 군 복무 중에 휴가 나와서 찾아오는 녀석, 졸업하고 새내기가 된 녀석들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내 품에 안긴다. 

“사랑합니다. 늘 건강하셔서 우리 길잡이가 되어 주십시오.” 

최고의 찬사를 받았으니 지금쯤 아보가드로 선생님을 만난다면 우쭐대며 자랑하고 싶어진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교직이었다. 직업이라기보다 자식을 키우는 마음으로 수많은 시간을 분주하게 보냈다. 수많은 회한과 추억을 남긴 짧지 않은 교직 생활이다. 마무리해야할 시점이 다가오니 왠지 한 줄기 찬바람이 스쳐간다. 그것이 미련인지, 나이 듦에 대한 허무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땀으로 보낸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의 모든 직업은 땀으로 이루어져 신성하다고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직은 직업이기에 앞서 순수한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아보가드로 선생님으로부터 전해진 사랑을 변치 않게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시 태어나도 교직을 택할 만큼 나는 스승의 자리가 자랑스럽다. 언제나 내 앞에 우뚝 서서 말없이 손 잡아준 나의 선생님이 오늘은 더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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