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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낙엽길 스케치

매일 아침 출근길에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아파트 지킴이 제복을 입은 할아버지다.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곳곳을 밤사이 점하고 있는 낙엽을 몰아내어 보듬고 쓰다듬는 일로 쓱싹쓱싹 빗소리를 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출근하면 어느 새 버스는 학교 밑 아파트 앞에 선다. 그러면 넓은 길을 차지하고 있는 아파트 마을을 통과하게 된다. 이곳에는 오랜 세월을 지켜온 나무들이 아름드리 우거져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하며, 높이 솟은 우람함은 지나가는 이에게 근엄함과 당당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가을엔 수많은 천사의 옷을 벗어 주는 것처럼 아침 갈대바람에 살포시 떨어지면서 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순간촉감은 그 무엇보다도 감미로움을 준다. 그리고 그 앞에 나를 막고 있는 낙엽 모으는 할아버지는 모자를 쓰고 말이 없다. 떨어지는 낙엽의 향기에 도취된 듯도 하고, 나무가 주는 근엄함에 침묵을 지키는 듯도 한데 묵묵히 쓱~싹 쓱~싹 운율에 맞추어 내려 쓸어가는 나뭇잎 불러 모으는 소리는 나의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2음보를 만들어 낸다. 아직도 이 길 저 길에 오색찬란한 수를 놓은 듯, 낙엽으로 얼룩진 아스팔트의 검은 얼굴을 한 순간에 광대의 모습처럼 화려하게 분장해 버린다. 한 잎 한 잎 밟으면서 앞으로 나가니 나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그윽한 잎새의 체취에 빠져 콧노래 부르며 희망의 아침을 노래한다. 매일같이 거쳐가는 아파트 출근길은 하나의 길이지만 나에겐 두 갈래의 여로를 만들어 준다.

한 갈래의 여정은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 나타나기 전의 길이다. 이 길에는 많은 나뭇잎이 온통 차로와 인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덮고, 나를 덮고, 행인을 덮어주어 아침 출근의 상쾌함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나무를 흔들지 않아도, 나뭇잎을 줍지도 않아도, 내가 마스크를 해도 훈훈한 가을의 소박한 단풍 냄새는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낙엽에서, 이미 밤새 자리를 차지한 도로에서 풍겨난다. 마치 내가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산화공덕을 연상시켜 주는 것 같다. 밟으면 아삭아삭, 떨어지면서 사그락사그락, 바람엔 싹싹 물음표 같은 소리를 나에게 던져 줄 때마다 나는 느낌표 간은 소리로 대답해 준다. 주고받는 다정함이란 소리 없이 웃지 않아도, 소리 없이 고운 얼굴에 웃음을 던져 주고, 소리 없이 사랑을 표현해도, 느낌 없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낙엽이 주는 이 향기를 취하도록 마시고, 이 낙엽이 나의 발을 온통 물들이도록 밟아 가득 담고, 그리고도 내 가슴에 가득 품고도 모자라 내 옷까지 가득 물들여 학교에 간다. 그런 향기가 사라질 세라 이 교실 저 교실을 쉴 새 없이 다니면서 향기를 털어내고 가을의 정서를 심어 놓는다. 그러면 웃지도 않는 학생은 나를 보고 먼저 웃음의 향기를 던진다. 낙엽이 주는 향기는 학생에게 웃음을 넘어 교실 친구에게 아름다운 우정의 향기로 바꾸게 하고, 한 시간 동안 수업은 서로에게 서기향으로 액화되어 나타나 새로운 학업의 질을 드높이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는 한 시간 열정수업이 이 향기로 인해 즐거움이 계속되길 바라기에 늘 이 길을 걷는다.

또 다른 한 여정은 할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아파트 길을 다녀간 뒤의 길이다. 그 길에는 낙엽도 없다. 개구쟁이들이 먹고 난 과자 봉지도 없다. 휴지가 바람에 날아와 앉아 있는 자리도 없다. 그렇다. 깨끗함 그 자체다. 천사가 놀다간 뒤라서 더 깨끗한 길인지 모르겠다. 맑고 고운 얼굴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변화를 보이듯, 미소를 품은 좋은 얼굴은 자신이 만들어 갈 때 타인에게 친근감을 준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파트 길을 걸으면 어느 새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연상하게 된다. 참다운 길은 참다운 생각을 만들어 내는 환경이 조성될 때 나타나고, 청초한 길은 맑고 순수한 마음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때 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이 두 길을 매일 걷고 생각하면서 다니지만 오늘 따라 두 길에 나를 초청하는 것은 왠지 가을이 주는 고적감일까? 아니면 삶의 한 단면을 회고해 보는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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