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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어릴 적 우리 집은 큰 마당과 사립문이 있었다. 오징어 놀이, 사방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등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한두 명씩 아이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온종일 시끄럽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라." 며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셨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이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우리 집에 ‘마실’(충청도 사투리로 남의 집에 놀러감을 이르는 말)을 와서 담소를 나누거나 윷놀이를 하셨다. 그런 분들 중에는 병수 형 어머니도 계셨다. 병수형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병수 형 어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계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병수 형은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농사일 거들어 주시는 날이 많았다. 형님은 어찌나 건강했던지 나보다 나이는 열 살 정도 많았지만 나를 번쩍 들기도 했고 쌀가마를 뒷 광으로 옮기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밥도 나보다 두 세배는 더 먹었고 덩치도 컸다. 7남매 대식구인데도 늘 친형제처럼 지냈다.


어느 추운 겨울, 첫눈이 우리 동네를 하얗게 수놓았다.

 
"원성아(당시 집에서 불렀던 내 이름)" 사립문 쪽에서 힘없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수 형 어머니셨다. 지병이 있으셔서 몸이 야위셨고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아휴, 형님(어머니가 병수 형 어머니를 부르던 말) 오셨어요." 아침을 드시다 말고 어머니는 부리나케 마당으로 뛰어나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요양원에 계시다가 우리 집으로 오셨던 모양이었다. 그 해 겨울,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총각김치에 보리가 많이 들어간 밥이 전부였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며 한 겨울을 함께 했고 병수 형 어머니도 점점 병세가 회복되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인정만큼은 넉넉해서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지금은 어머니는 저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지만  첫 눈이 올 때면 까마득한 세월을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우리 엄마와 지병으로 고생을 하시면서도 병수 형님을 사랑과 정성으로 잘 키우셨던 병수형님 어머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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