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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독립운동의 물꼬를 튼 도시, 상하이



외국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우리나라의 것을 만난다. 늘 보던 것이지만 외국에서 만나면 반가울 때가 많다. 지금이야 우리 기업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우리 문화가 널리 퍼져있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중국 여행 중 본 한국 자동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지금도 가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한글은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 것이 드문 외국이니까.
 
그러나 어떤 외국의 도시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 위해, 또 대한민국의 역사를 찾기 위해 가봐야 한다. 물론 거기라고 우리나라의 흔적이 거창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거창한 것이 늘 위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규모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이전과 다른 새로운 흐름,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누리는 현재를 담기 위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규모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처럼 장황한 소개가 필요한 외국 도시는 어딜까. 바로 중국의 상하이(상해)다.

■1932년, 심란한 상하이=상하이 황포강 일대의 와이탄(외탄)과 푸동(포동)은 어떤 아시아 도시와 견줘도, 아니 세계의 유수 도시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다. 한쪽에는 고색창연한 아르데코풍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고 다른 한쪽인 푸동에는 동방명주를 비롯해 수 백 미터 높이가 넘는 현대식 빌딩이 즐비하다. 대국굴기(大國崛起)란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미국과 더불어 G2로 발전하는 중국의 현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9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심란했던 곳이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을 동원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 일대를 장악한 뒤 상하이로 눈을 돌렸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분산시킬 필요와 함께 중국에 대한 무력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1932년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이용해 일본 승려 구타사건을 자작극으로 꾸민 뒤 1월 28일,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본격적인 상하이 침략에 나섰다. 상해사변이다.  수 만 명의 중국군이 맞서 싸웠지만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며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도 대립하던 때라 여간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상하이에서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난다.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일으킨 사건이다.



■4월 29일, 홍커우 공원=그 한국인을 기리는 장소가 있다. 홍커우 공원. 지금의 루쉰 공원이다. 이 공원은 꽤 넓은 공간과 함께 현대 중국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학가 루쉰의 묘가 있다. 묘와 멀지 않은 곳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 매원이 있고 그 가운데에 2층의 전시관 매헌이 있다. 매헌! 한국인 윤봉길의 호다. 매헌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여러 면에서 특별하다.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려움 속에 있었다. 또 중국인과 한국인은 서로를 의심했으며 때로는 충돌(1931년 만보산 사건)했다. 일본의 침략 앞에서 힘을 합쳐도 부족할 상황이지만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때에 일본은 상하이 함락과 자신들의 천황(일왕) 생일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 대외적으로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1만 명이 넘는 군인이 도열하고 상하이 침략에 공이 큰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해 주요 일본 사람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김구 선생은 급하게 움직였다. 행사 참여 준비물은 공지를 통해 일장기와 물통, 그리고 도시락만 반입이 가능했다. 이에 맞춰 윤봉길 의사는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을 숨겨 나섰다. 거사 당일, 수 십 미터 밖에서 일본 헌병이 만든 경계선을 뚫고 정확하게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명중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데 당시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던 시라카와는 즉사를 피했지만 곧 죽음을 맞았고, 나중에 미국 미주리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상하이 일본 공사 시게미쓰는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던 일본에게 큰 충격을 줬고 절망에 빠진 중국과 한국에는 저항의 의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중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비밀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1937년, 충칭(중경)시기부터는 공식적인 지원을 통해 광복군 창설에 도움을 줬다. 또 국제연합과 연합국 수뇌에게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1932년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상당 부분에서 한중협력의 결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다. 그러므로 루쉰 공원의 윤봉길은 한국만 기억할 윤봉길이 아닌 것이다.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를 교과서로 간단하게 살펴보는 데 익숙해지면 어떤 사건이나 결과 중심으로 보려는 조급증이 생긴다. 역사 교과서 집필진의 어려움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워낙 방대한지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몇 줄로 서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이봉창 의사, 그 주변의 한인애국단, 그리고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시선을 줄 때 비로소 당시 사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1919년 상하이부터 살펴보자.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 산발적인 독립운동에서 벗어나 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또 일제에 대한 저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 독립운동의 목표로 설정됐다. 이러한 움직임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3․1운동을 계기로 국민을 믿고 나아가도 되겠다는 독립운동가의 각성에 따른 것이었다. 
 
곧 서울에 한성정부, 연해주에 노령정부,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는 4월 11일(대외공포는 4월 13일)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는데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과 상통한다. 이후 안창호 선생 등의 노력으로 한성정부와 노령정부를 합쳐 그해 9월에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여러 세력의 지향점 차이로 혼란을 겪었고 그 결과 지도체제만 해도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 그리고 다시 주석제로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임시정부 초기의 권위는 사라지고 존재조차 희미해진 것이다. 인력난은 물론 재정난도 심각해 상하이 안에서도 10여 차례 이사를 가야했다. 이때 상하이로 망명 온 정정화(김가진 선생의 며느리)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을 위해 6차례나 국내로 자금을 구하러 가야했을 정도다. 

■한인애국단, 그리고 이봉창 의사=임시정부가 자금난에 허덕였던 이유는 겉으로는 연통제와 교통국 같은 연락체계가 무너지고 미국의 구미위원회가 해체되면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포들에게 임시정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갖게 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꾸려 김원봉의 의열단과 같은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이봉창 의사가 김구 선생을 찾았다. 원래 이봉창은 일본 사람들에게 차별당하는 것이 싫어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도쿄에 머물 때 수중에서 한글 메모가 발견된 것만으로 감옥에 갇힌 일을 계기로 곤경에 빠진 한국 사람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상하이로 왔다. 
 
그는 도쿄 생활을 통해 일본 천황(일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금이 들어왔고 김구는 이봉창 의사를 일본에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32년 1월 8일, 도쿄 궁성 앞 사쿠라다몬 앞에서 이봉창이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 신문들의 표현처럼 ‘불행히도 맞지 않은(不幸不中)’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안팎의 관심이 임시정부, 그리고 한인애국단에 집중됐다. 독립운동 자금은 풍부해졌고 폭탄 제조에 중국군이 직접 참여할 정도였다. 윤봉길 의사가 들고 간 폭탄은 많은 시험을 거친 폭탄이었다. 결국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성공했고 세계는 대한민국, 그리고 임시정부를 주목하게 됐다.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지금 상하이 마당로에 가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볼 수 있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중국 영토지만 프랑스 조계지여서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요인들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기도 했다. 안전한 곳의 패러독스다. 그나마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터지자 일본군의 침탈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인 피치 목사 부부의 도움으로 김구 선생 등이 피신하는데 성공했지만 정확한 소식을 몰랐던 안창호 선생은 체포돼 국내로 송환됐다. 

지금 유적은 ‘청사’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싶은 주택가의 작은 공간이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면에서 소중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 곳, 본격적인 한중협력을 통해 독립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는 그 역사를 따라가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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