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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서리 내린 뒤, 꽃향기는 짙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항저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제가 임시정부와 요인을 본격적으로 추적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제의 표적이 된 김구 선생은 미국인 목사 피치(Gorge A. Pitch)의 도움으로 20여 일 몸을 숨겼지만 일제의 포위망은 더욱 조여 왔다. 바야흐로 임시정부의 피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임시정부에게 피난 생활이 별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 원(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가 내건 현상금 총액. 지금의 200~300억 원에 해당)이 걸려있고 조계지처럼 그들을 막아줄 무엇이 없다면 그 긴박함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낯선 이의 시선은 물론 현상금에 눈이 멀었을지 모를 밀정도 의심해야 하는 생활인 것이다.
 
임시정부의 피난 생활은 1940년 충칭(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통솔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그런데 사람의 일이 그렇듯, 죽을힘을 다해 버텨내는 동안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도 생겼다. ‘위기’, 위험하지만 기회도 동시에 온 것이다. 상하이에서 그럭저럭 지위를 유지해나갔다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국화가 서리 내린 뒤에 그 향기가 짙어지는 것처럼 임시정부도 시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항저우(항주), 그리고 자싱(가흥)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 정부 덕분이었다. 홍커우 공원 의거로 임시정부를 주목하기도 했거니와 박찬익 선생처럼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개인적 인연도 작용했다. 임시정부를 항주로 옮긴 뒤 김구 선생은 국민당 정부 소개로 비밀리에 저장성(절강성)의 저명한 인사 주푸청(저보성)을 만났다. 주푸청은 그의 아들이 운영하다 잠시 문을 닫은 자싱(가흥)의 종이공장인 수륜사창에 몸을 숨기도록 했다.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상하이 법학원장, 저장성 성장을 역임한 주푸청이 김구 선생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선택한 것이다. 주푸청의 양아들 첸둥성(진동생)의 집인 매만가 76호가 김구 선생의 피신처였다. 자싱은 철도나 수운의 중심지인데 특히 ‘호수가 낙지발같이 사방으로 통하는 곳’으로 어린 아이도 노를 저을 줄 아는 수향(水鄕)이었다. 김구 선생이 머물던 작은 집은 2층이지만 구조가 복잡하면서도 밖을 내다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여기에 더해 호수로 배를 띄워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때 임시정부 요인들도 자싱에 숨어 지냈다. 주소는 일휘교 17번지인데 김구 선생의 피신처에서 불과 몇 분 거리다. 그럼에도 당시 국민당 정부의 기밀 유지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이름도 바꿔 중국 광둥 사람 장진구, 또는 장진이 됐다. 하지만 일제는 감시망을 좁혀 항저우 일대로 밀정을 파견했고 자싱의 김구 선생 은신처도 안심할 수 없게 됐다. 이역만리에서 다시 더 비밀스런 장소를 찾아야 했다.



활동사진으로 만대에 남길 기록의 정체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해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한’ 어떤 사건을 적어 놓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다지도 사무치는 고마움을 표현했을까. 
 
주푸청은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며느리인 주자루이(주가예)에게 김구를 부탁했다. 주자루이는 친정의 피서별장을 김구 선생의 은신처로 제공하기로 했다. 남자들이 움직이면 시선을 끌 것을 염려해 김구 선생과 주자루이만 친정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다시 별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차를 탈 수 없는 곳에 이르자 한여름 불볕더위에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서남산령의 산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런 고생 끝에 김구와 주자루이는 하이옌(해염)의 재청별서에 도착했다. 김구 선생은 해방이 되면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주부인을 존경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글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건국훈장은 한참 늦은 1996년에 주푸청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언젠가는 감사의 뜻을 더 전하는 일이 필요하겠다.
 
재청별서는 전형적인 청나라 말기의 별서다. 별서란 잠시 더위를 피해 경치 좋은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지은 별장으로 당시 주씨 집안에서는 묘소 제청으로 쓰고 있었지만 지금도 남북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시원한 대나무 숲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김구 선생도 여기에 머물던 반 년 동안 집 밖으로 산책을 하며 그동안 하기 어려웠던 등산도 다녔다. 십 수 년을 은신했던 처지를 생각하면 잠시의 제한된 자유가 얼마나 소중했을까.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무게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시장에서 경찰을 만난 뒤 끝났다. 김구 선생은 다시 자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젊은 여성 뱃사공인 주아이빠오(주애보)와 함께 밤에는 배에서 생활하고 낮에는 땅 위를 다니는 생활을 이어갔다.

어둠에 묻힌 아름다움

김구 선생이 자싱과 하이옌에서 은신하던 시절 임시정부는 항저우에 있었다. 지금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에는 호변촌, 사흠방, 청태 제2여사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거나 옮겨 다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정부에서 정비하고 유적지로 만든 장성로 호변촌의 임시정부 흔적이 꽤나 번화한 거리에 있다. 무엇보다 수 백 미터 거리에 항저우의 자랑거리 서호(西湖)가 있다. 백거이와 소동파가 쌓았다는 백제, 소제는 물론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중국 미인 가운데 한 명인 서시에 비견되는 호수다. 실제로 서호를 노래한 시도 많거니와 지금도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서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데도. 아마 항저우시절 임시정부는 아름다운 것을 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보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기회와 위협을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 해야 했던 시절이니.
 
임시정부는 항저우에 머물던 때 새로운 기회를 맞는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장개석)와 면담을 통해 뤄양(낙양)에서 한국인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상하이 시절, 중국 사람과 중국정부의 의심 속에서 활동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아울러 장제스는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연합국의 수뇌로 여러 회의에 참여한 인물이다. 우리의 처지를 연합국에게 전달할 통로가 마련됐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즈음 독립운동세력은 정당을 통해 활동 방향을 뚜렷하게 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의열단 등 5개 정치세력이 모인 조선민족혁명당이 생긴 것이다. 임시정부의 여러 인물이 여기에 참여하며 잠시나마 공백상태가 된 것이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는 이때부터 정당을 중심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갈 필요를 느끼게 됐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임시정부는 새로운 환경을 바탕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지척에 두고도 감상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런 역사의 의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사치를 누리고 있다. 자싱, 하이옌, 항저우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조금 죄송하고 또 고마운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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