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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강마을 편지 - 기강에서

망우당께 보내는 편지 1

강가의 아침은 안개가 주인입니다. 물 알갱이들이 부서지는 햇살에 재깔거리며 이리저리 웃음을 흘리고 장난질을 합니다. 이슬을 털면서 걷는 길에는 비릿하고 무성한 밤꽃내음이 어깨에 내려앉습니다. 길섶에는 희고 노란 인동꽃이 피어 청량한 향기를 뿜어내고 노랑붓꽃이 싱그럽게 웃어줍니다.

 

샛강이 몸을 비틀고 있는 기강나루엔 개망초가 피었습니다. 옆으로 버려진 준설선이 붉은 옷을 입고 힘겹게 주인 잃은 나루를 지키고 있습니다. 멀리 남지철교가 물안개로 희미한 강 위로 두둥실 펼쳐져 있고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이 보입니다. 그 강과 몸을 섞는 남강의 유려한 몸짓이 경이롭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강들의 섬세한 합방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습니다. 강은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세계로 향한 원초적 본능이 숨 쉬고 있는 현장입니다. 저는 이 곳에 서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망우당*, 당신께 강은 어떤 존재였나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경상우도의 백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이었나요? 청운의 뜻을 품고 출사하여 제이(第二)로 합격하였지만 답안의 내용이 기휘(忌諱)하다 하여 파방(罷榜)을 당한 울분을 토로한 곳이었나요? 저 역시 당신을 따라 이 강가에 섰습니다.

 

음력 사월 스무 이튿날, 새벽을 달려 이 강가를 찾은 이유를 당신께서는 아시겠지요. 기강, 거름강, 혹은 기음강이라 부르는 이곳에 섰습니다. 임진년 사월 열사흘 날 달빛이 바닷길을 열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부산포를 향해 왜선 수백 척은 대마도를 떠났을 것입니다. 굶주린 승냥이보다 더 포악하게 이 땅을 향해 달려들었고 물어뜯었습니다. 무방비로 부산포가 무너짐을 피난 온 보부상에게 들었던 날 하늘에는 보름달이 기울고 있었겠지요. 야인으로 살고자 하였던 당신의 손에 낚싯대는 미세하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이 땅을 침입한 왜의 무력과 분탕질로부터 이 땅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백성을 지키고자 다짐하고 일어섰을 때, 밤새 앉았던 그 바위 위로 까치가 울었겠지요. 희멀건 안개로 머리를 푼 강이 다시 당신께 다가설 때 축축한 옷자락을 여미고 천지신명께 절하여 고하였을 것입니다. 태부 고개를 넘어 세간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걸었습니다. 이 땅의 서슬 퍼런 기상이 살아있음이 경상우도 의령 땅에서 처음으로 빛이 솟구쳤습니다. 그 빛을 따라 전라도와 경상좌도를 거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울부짖던 백성들의 가슴에도 뜨거운 것이 뭉클 흘렀습니다.

당신께서는 기강 갈대밭에 엎드려 비릿한 물내에 섞인 왜의 움직임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하고 무섭고 빠르고 잔인하다는 풍문을 들려올 즈음, 순찰사 김수가 감영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갔다는 억장 무너지는 소식도 함께 접하셨습니다. 칼을 뽑아 그를 처단하려 하였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지키는 것이기에 낙동강을 따라 오르는 왜선을 기다리며 겨우 십여 명의 장졸들과 듬실마을 뒷산에 소나무를 베었습니다.

 

목장(木杖)*을 강심(江心)에 박아 병참선의 진로를 막기 위한 전략이었지요. 낙동강을 따라 대구를 거쳐 안동과 문경으로 가는 수로와 남강을 타고 올라가 진주를 거쳐 전라도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셨습니다. 숨죽인 기다림 끝에 드디어 목장에 왜선이 걸렸습니다. 왜선 두 척을 향해 돌과 불덩이를 던지는 아득하고 긴 시간의 싸움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장정들을 격려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배를 향해 밤이면 싸우고 낮이면 숨는 처절한 게릴라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임진란 오월 초순, 기강에서 첫 전승 소식은 빛보다 빠르게 이 마을과 저 마을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폭죽처럼 핀 찔레꽃이 둔지 언덕에 지천이었고 모심기가 끝난 듬실 들에는 어린모들이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겠지요. 임진년 경상우도 의령, 산음*, 초계, 삼가, 창녕에 비로소 논으로 가는 흰옷 입는 농군이 보였을 것입니다.

 

왜선을 향해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핏빛 첫 전투를 시작하던 그 강에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머루빛 눈동자가 초롱하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웃으며 당신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저에게 장군님의 낚시터인 바위를 알려줍니다.

 

당신께서 파방 후 강호에 은둔하였던 곳이 둔지 강사로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기강의 어디쯤인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기상을 이어받은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진실의 조각은 어딘가에 반드시 숨겨져 있음을 생각합니다. 아이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기강 언덕에서 왜선을 향해 선 당신 곁에서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을 것입니다. 이 땅을 지키던 그 분들의 붉은 혼은 강처럼 흘러서 우리 곁을 맴돌고 우리를 깨우치고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당신께서 낚시로 소일하시던 강가에는 평화에 익숙한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꽃처럼 피어나고 그 옆으로 강둑이 길게 하품을 합니다. 잔잔히 부서지는 물결 위로 멀고 가까운 곳의 새들이 번갈아 노래하는 아침입니다. 먼 곳에서 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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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봉기한 곽재우 장군의 호이다.

목장: 나무 말뚝

산음: 산청의 옛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