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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에 묻힌 조선의 인성교육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인성함양’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교육에서 가장 많이 비판받아 왔던 부분 역시 ‘인성교육의 부재 또는 실종’이었다.

 

인성교육이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믿음 중 하나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노력을 계승하고, 그 방법을 적용한다면 인성교육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금까지의 학술 연구들에서도 조선시대 인성교육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당시의 인성교육은 하나의 전범(典範)처럼 간주되고, 나아가서는 자긍심을 갖게 하는 신화와 같은 성격마저 띠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점이 있다.

 

지금 우리의 인성교육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입시위주 교육’이다. 조선시대 역시 ‘과거 합격’이 지상 목표였던 ‘과거시험 위주의 교육’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에서의 인성교육이 성공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을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의 인성교육은 과연 우리의 모델이었을까?

우선 조선시대가 교육을 통해 궁극적으로 학생들, 나아가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내면화시키려 했던 핵심적인 덕목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당시 국가에서 학교를 세워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부식시키려 했던 핵심 덕목들은 바로 ‘효제충신’, 곧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군주에 대한 충성, 이웃 간 믿음이었다. 이러한 ‘효제충신’과 함께 중시되었던 덕목들이 있었는데, 바로 ‘예의염치’였다. 예의염치란 절도를 지키고, 숨김이 없으며,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항상 올바름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의염치는 국가가 국가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사람에게 예의염치가 없다면 ‘본능’에 지배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익을 탐하거나, 종종 거리낌 없이 불법을 자행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며, 이는 ‘개인의 타락’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국가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즉, 예의염치가 제대로 신장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국가의 멸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예의염치라는 중핵적 덕목을 개인들에게 내면화하는 인성교육이국가의 사활적 관건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다면 인성교육을 위한 당시의 이런 노력들은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을까? 무엇보다도 조선시대의 인성교육은 과연 우리의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유생들의 인성 실태

조선시대 인성교육의 실상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시 핵심 수학집단이었던 유생들(또는 선비들)의 일상적 행태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바로 ‘출석’이다. 출석은 기본 중의 기본 생활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생들의 ‘출석부정 행위’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과거시험(대과) 응시를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성균관 출석일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성균관의 열악한 여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출석을 하는 유생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유생은 대리출석과 허위증명서 제출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석문제를 해결했다. 학교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할 규칙인 출석조차 부정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유생들의 ‘인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언급할 것은 ‘학습방법’이다. 유생들은 평소 꾸준히, 성실하게 배움에 정진했다기보다 과거시험이 다가오면 급하게 준비하는 ‘벼락치기’가 일반적이었다. 유생들은 유교경서를 전체적으로 학습하기보다는 초집이라는 예상문제집에 의존하여 과거시험 준비를 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위주로 손쉽게 준비하고자 하는 요행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 유생들의 불성실했던 측면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초집의 문제점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간편하게 과거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방법에 의존하게 되면서 유생들이 평소에 꾸준히 학습을 하지 않으려는 ‘학습태만’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유생들의 학업 태만은 비정상적 혹은 일탈적 행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이러한 행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유생들의 왜곡된 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험 연기’ 또한 빈번했다. 당시에는 수험생 본인이 응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었다는 증명서만 내면 시험 연기가 허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유생들은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다른 수험생들보다 많은 시험 준비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허위증명서를 제출하고 2차 시험을 다음번 과거로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 자체가 명백한 범법행위이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비난을 받을만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인성 실태를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는 일종의 ‘위장전입’ 행태이다. 당시 왕이 행차하는 지역의 경우 시혜 차원에서 그 지역의 유생들만을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는 관행이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하는 유생이 원래 그 지역의 원주민 행세를 하면서 응시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시험을 보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생들의 과거합격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불사한다는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들 인성 수준이 어느 선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하는 다소 충격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인성교육이 이뤄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유생들의 행태들을 통해 본 그들의 인성은 지금의 우리 학생들의 인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학생들보다도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왜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는가? 당시 인성교육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대사헌 송인수 등이 상소하기를) 과거 합격의 혜택이 선비들로 하여금 학업의 올바른 뜻을 앗아가므로, 공명(功名)·부귀의 생각만 굳어지고 효제충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요행을 바라고 속이는 버릇은 익숙하고 예의염치는 생각 밖에 두니, 가르치는 법이 무너진 것이 지금보다 극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재가 나오지 않고 풍속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아서 근원이 된 것입니다. - 인종실록 원년 4월 을사

 

아무리 국가가 인성교육에 매진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과거 합격에만 관심이 있는 유생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품성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기보다는, 단지 시험 합격을 위해 불의(不義)한 방법이라도 마다하지 않게 됨으로써 결국 국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올바른 인성 함양은 어렵게 되었던 것임을 위의 기록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겠다’는 시험이 만들어낸 욕망은 인성 함양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성교육의 조건은 무엇인가? 결론은 자명하다.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게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인성교육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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