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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절을 찾아서

코로나 걱정 없이 역사 공부·힐링 한 번에!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지 1년 반이 넘었다. 마음은 답답하고 몸은 무겁다. 갈 수 있는 곳이 줄어드니 길을 떠나는 것도 걱정스럽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 해도 사람이 많지 않은 공간에서 자연과 만나는 것은 소중한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자연과 호흡하며 자기 자신을 다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좋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사람마다 그 공간은 산이며 바다며, 숲이며, 혹은 궁궐이나 왕릉이 될 수 있다. 그중 하나로 이번 방학에는 절, 산사는 어떨까. 절은 산에 있으니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산이 절을 품은 데에는 다 사연이 있으니 그 이야기를 통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강원 정선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정암사’

 

처음 소개할 곳은 정선의 정암사다. 골짜기가 깊기로 소문난 정선의 정암사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한 곳이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정암사가 이런 내력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활동하던 자장율사와 관련이 있다. 
 

정암사를 상징하는 유물은 국보로 지정된 수마노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마노석을 다듬어 탑을 쌓고 그 안에 부처님의 사리와 염주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탑이 있어 정암사는 적멸보궁이 됐으니 절 뒤 언덕에 있는 수마노탑에 잠시 다녀오면 좋을 것 같다. 여기에서 내려다보는 정암사도, 강원도의 숲도 인상적이다. 
 

수마노탑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와 유물을 세 개의 탑에 각각 안치했다고 한다. 각각의 탑이 금탑과 은탑, 그리고 수마노탑인데 자장율사는 후세 중생들의 탐욕을 걱정해 금탑과 은탑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전설을 증명하듯 정암사 근처에는 금대봉이며 은대봉 같은 이름을 지닌 봉우리가 있다. 수마노탑도 대단한 보물이지만 마음을 열고 볼 때 찾을 수 있다는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와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삶에서 아직 찾지 못한 보물, 금탑과 은탑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충북 제천 
다른 세상을 이어주는 길, ‘미륵대원’

 

충북이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월악산국립공원이다. 산과 계곡이 말 그대로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곳. 여기에 하늘재와 미륵대원이 있다. 하늘재는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연결하는 해발 고도가 525m의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하늘재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 때 북쪽으로 통하는 길로 처음 만들었던 곳이다. 백두대간을 넘는 유명한 고갯길로 죽령보다 2년 먼저 생긴 길이다. 새재며 이화령, 그리고 추풍령은 모두 후배가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하늘재로 이어진 두 지점의 이름이다. 충주 쪽은 미륵리, 문경 쪽은 관음리이니 미륵과 관음의 세계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이름이 생겨난 배경에는 양쪽에 미륵대원, 관음사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문경 쪽에는 관음사의 유물로 보이는 석불입상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유적이 좀 더 뚜렷하게 남은 곳은 충주 쪽의 미륵대원이다. 미륵대원은 다른 절 이름과 비교할 때 특이한 점이 보이는데, 바로 절과 함께 숙박시설인 ‘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륵대원 영역은 절이 있던 곳과 숙박시설이 있던 곳으로 나뉜다.
 

절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륵불이다. 고려시대 특유의 규모가 크면서도 소박한 표현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미륵불이 서 있는 공간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석굴사원 요소를 채택한 건물이다. 공간의 뒷부분은 석축을 불상의 어깨 부분까지 쌓아 올렸고 앞부분에는 나무로 만든 건물을 세웠다.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전통을 잇는 건축이지만 한편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적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절터에는 석등이며 석탑을 볼 수가 있다. 수준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화려함을 강조하던 고려시대 불교 조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석비의 받침으로 쓴 거북 조각이다. 규모가 무척 커서, 길이가 6m에 이르고 높이도 1.8m다. 어깨 부분을 보면 새끼 거북이를 조각해 놓아서 마치 어미 등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대원과 하늘재는 짧은 길이지만 미륵의 세계에서 관음의 세계로, 다시 관음의 세계에서 미륵의 세계로 다녀올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 백두대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길이다. 

 

 

충남 서산 
마음을 씻고 여는 곳, ‘개심사’

 

서산의 개심사는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절이다. 아름다운 숲길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어떠한 곳인지 알려주는 표식도 있다. ‘세심동 개심사’ 마음을 씻는 동네에 마음을 여는 절이다. 개심사는 봄이면 화려한 꽃의 향연에, 여름이면 시원한 숲과 솔바람에 취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개심사는 백제 말기 창건했는데 지금 대웅전은 조선 초기 건축물로서 주심포에서 다포로 넘어가는 양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 근대 선승으로 선풍을 일으킨 경허 스님이 머물던 곳이라는 점에서 청량한 기운도 느껴진다.
 

개심사는 자연과 어울리는 모습을 잘 보여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재주가 있다. 대웅전 건물에서 눈에 띄는 건 검은 기와 위에 놓인 연봉이다. 기와지붕 끝에 기와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지만 검정과 흰색의 조화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오래된 스님들의 거주처, 심검당의 기둥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 자연이고 어디까지가 인공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휘어진 기둥 그대로를 활용해 건물을 지은 사람들이야말로 세심, 개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심사를 조금 더 잘 보려면 오른쪽 언덕인 명부전 뒤 산신각에서 보면 된다. 거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산과 숲처럼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절을 볼 수 있다.

 

 

전북 고창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 ‘선운사’

 

선운사는 봄이면 동백,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데 여름의 배롱나무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절 건축물 하나하나가 단아해서 주변의 산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선운사는 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워서 주변을 함께 둘러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창건된 것은 백제 위덕왕 때다. 검단선사가 연못이 있던 곳을 메워 지금의 선운사를 지었다고 한다. 
 

절을 세웠을 때 주변에 도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 절을 옮기거나 장정들을 모아 절을 지켜야겠지만 검단선사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썼다. 먹을 것이 있다면 도적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 도적들을 모아 가까운 바다에서 소금을 굽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렇게 되자 도적은 사라지고 오히려 절에 해마다 귀한 소금을 바치는 사람들이 됐다. 
 

이런 내력 덕분일까. 선운사 뒤로 이어진 길을 30여 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속칭 도솔암 마애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진다. 높은 절벽에 15m가 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배 부분에 작은 구멍이 있다. 여기에 세상을 구할, 비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1820년, 전라도 감사 이서구가 열어보려 했지만 벼락이 치는 바람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이 비기를 열어본 인물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 장군과 세 명의 대장으로 손꼽히던 고창의 대접주 손화중이다. 

 

절과 도둑, 절과 혁명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그러나 선운사는 그것을 잘 품었으니 절 본연의 모습이 흐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선운사의 깊이가 더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전남 구례 
부처님의 세계로…‘지리산 화엄사’

 

보통 절에는 어떠한 것이 좋은,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화엄사는 앞에 그 절이 있는 곳만 적어주어도 충분하다.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에 적혀있는 이름만으로 화엄사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건축물과 조각물이 있는 화엄사는 무언가 지리산과 많이 닮았다.
 

화엄사를 대표하는 건물은 각황전이다. 여기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사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스님은 벽암스님이다. 병자호란 때 왕실과 맺은 인연이 바탕이 됐다. 다만 화엄사에서 가장 컸던 건물, 곧 대장경 석판을 벽에 가득 채운 장륙전만은 복원하지 못했다. 그 임무는 이후 제자인 계파스님에게 이어졌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고민만 하던 때였다. 꿈에 신인이 나와서 장륙전을 시주할 귀인이 올 거라고 한 것이다. 기대에 부푼 계파스님은 다음날 절을 찾아오는 사람을 보고 실망하고 말았다. 절에서 일을 도와주고 끼니를 이어가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 말을 전하니 할머니는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 듯 늪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뜻밖의 안타까운 일에 계파스님으로서도 큰 낭패였으리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계파스님은 한양으로 시주를 갔다가 우연히 산책 나온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우리 스님이라고 하며 쫓아왔다. 공주는 태어날 때 손을 쥐고 있었고 이것이 펴지지 않았는데 이때 처음 폈다. 손에 글씨가 적혀있으니 장륙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이 장륙전을 짓는데 크게 도움을 줘 각황전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숙종에게는 이럴만한 공주가 없었으니 이 이야기는 당시 왕실과 화엄사의 인연, 특히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화엄사 시주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도 보인다. 화엄사는 이렇게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니 그 내력을 각황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각황전 옆으로 난 언덕 위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은 그 조형 감각이 탁월하다. 연기조사와 어머니에게 효를 행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다른 이론도 등장했다. 다보탑과 비교될 정도의 완벽한 성취를 이뤄낸 탑을 보고 있으면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경북 영주 
소백산맥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부석사’

 

영주 부석사는 아름다운 것이 많다. 지면이 허락하면 많은 것을 꼽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섯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 번째는 창건 내력과 관련된 의상의 호국불교다. 의상이 화엄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났다고는 하지만 급히 귀국하게 된 것은 바로 당의 신라 침공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 부석사를 지었으니 이후 의상, 혹은 그 영향 속에서 생겨난 절은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와 비슷하게 겹친다. 양양 낙산사며 부산 범어사, 그리고 합천 해인사 등을 그 예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선묘와 의상의 사랑 이야기다. 의상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연모하는 마음을 가졌던 선묘는, 귀국길을 서두르는 의상을 만나지 못했다. 오래 기다렸던 의상을 만나지 못한 선묘는 좌절하는 대신 용이 돼 의상을 지키고자 했다. 선묘 아가씨가 선묘용이 된 것이다. 선묘용은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방해하던 도적을 신통력으로 돌을 공중에 띄워 몰아냈으니 부석사 이름은 그렇게 정해진 것이기도 하다. 무량수전 뒤, 조그마한 선묘각에서 그 이야기를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세 번째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아마도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닐까. 고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기둥이며 보, 공포가 보여주는 구조에서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쉽게 드러난다. 그 배경에 배흘림기둥을 비롯해 가장 바깥 기둥을 높이고, 또 중심부로 기울여 놓은 기법을 통해 착시현상을 해결하고자 했던 기법까지 알게 되면 더 놀라게 된다.
 

네 번째는 석축이다. 여름에 부석사를 살펴볼 때는 조금 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어지는 절의 중심을 향한 길은 조금씩 높아지기 때문이다. 중간에 만든 여유 공간에 건축물이 들어섰고 이들 공간은 다시 사람을 절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탁월한 공간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것이 있으니 바로 석축이다. 부석사의 공간은 이들 석축에 기댄 것이다. 경사가 있는 땅에 석축을 쌓아 공간을 만들었으니 자연을 건드리지 않고도 원하는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축과 건축물을 활용한 절의 위치다. 부석사에 가면, 특히 무량수전 앞에 서서 뒤돌아보면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던 노력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노력 끝에 만나는 절경, 삶의 모습과 조금은 닮은 것 같다.

 

 

경남 남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로, ‘보리암’

 

쉽지 않은 일상을 이어가는 요즘, 노력을 다하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소원을 빈다. 그리고 삶이란 노력이 기본이나 운이라는 것도 더해져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 점에서 남해 보리암은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육지 건너 섬, 그것도 금산 꼭대기에 가까운 보리암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셔틀버스로 조금 편하게 갈 수 있게 됐지만 수도권 사람들이 여기로 가기 위해서는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보리암은 찾은 사람들이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 올 결정을 한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래로 펼쳐진 한려수도의 아름다움, 그리고 보리암을 품고 있는 금산의 멋진 모습과 보리암이 가진 사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보리암은 원효대사가 관음을 만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관음을 친견한 원효는 ‘보광사’란 절을 지었는데 절이 있는 산 이름도 나중에 이를 따라 ‘보광산’이 됐다. 보광사는 나중에 ‘보리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간이 흘러 보광산에 태조 이성계가 와서 왕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관음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자를 받았는데 그 덕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태조는 산을 비단으로 감싸려고 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자 산 이름에 비단 금(錦)을 써서 ‘금산’이라 부르도록 했다. 또 조선 왕실은 보리암을 원찰로 삼을 정도로 이 절을 귀하게 여겼다.
 

우리나라 관음도량 가운데 하나인 보리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다녀오면 무언가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는 절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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