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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옥수수처럼 이 땅에 잘 뿌리 내렸으면

 

요즘 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옥수수 심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옥수수를 볼 때마다 박완서 단편 <카메라와 워커>가 떠오른다. 옥수수가 이 소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로 쓰였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워커>는 작가가 1975년 발표한, 다른 박완서 소설처럼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6·25 때 목숨을 잃은 오빠의 아들, 그러니까 작가의 조카를 키우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오빠가 전쟁 중 참혹하게 죽고 올케도 폭사해 어머니와 함께 어린 조카 훈이를 키웠다. 주인공이 결혼해 첫아기를 낳았을 때도 꼭 둘째아기를 낳은 기분이었다. 주인공 어머니 소원은 손자가 좋은 대학 나와 ‘결혼해서 일요일이면 처자식 데리고 카메라 메고 놀러 나가고 당신은 집을 봐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훈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택하자 억지로 이과로 전과시킨다. 오빠가 6·25때 까닭 없이 죽은 것이 문과 출신인 것과 상관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훈이는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져 삼류대 공대 토목과에 입학한다.


대학은 무사히 졸업했지만, 취직은 쉽지 않았다. 훈이가 해외취업을 하겠다고 하자, 주인공은 ‘꼭 이 땅에서, 내 눈앞에서 잘살아주었으면 하는’ 소망에, 그리고 그것이 ‘내가 겪은 더럽고 잔인한 전쟁에 대해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해 만류한다. 훈이는 겨우 Y 건설의 영동고속도로 건설현장에 임시직 자리를 얻는다. 


현장소장이 가르쳐준 준비물에는 워커도 있었다. 그런데 한여름이 되도록 연락이 없자 주인공은 오대산 월정사 입구 공사현장으로 찾아간다. ‘참 옥수수도 많은 고장’이었다. ‘저만치 한여름의 옥수수밭이 짙푸르고, 마을의 집들은 온통 약속이나 한 듯이 주황 아니면 빨간 지붕을 이고 있었다.’

 


훈이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숙방은 좁고 더러웠고 워커에서는 악취가 심했다. 봉급도 형편없었지만, 임시직 신세라 하소연할 수조차 없었다. 공사현장은 벌써 서울물이 들었는지 인심이 박했다. 조카는 “이 옥수수 고장에서 여태껏 옥수수 한 자루를 못 얻어먹어 봤다”고 했고, 주인공은 그 얘기를 듣고 부아가 부글부글 치솟는 걸 느꼈다.


주인공은 조카에게 서울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조카는 더 비참해지고 싶다며, 그래서 “고모와 할머니로부터, 그리고 이 나라로부터 순조롭게 놓여나고 싶다”며 거절했다.

 

드디어 버스가 오고 나는 그것을 혼자서 탔다. 나는 훈이에게 몇 번이나 돌아가라고 손짓했으나 훈이는 시골 버스가 떠나기까지의 그 지루한 시간을 워커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그게 보기 싫어 먼 데를 바라보았다. 논의 벼는 비단 폭처럼 선연하게 푸르고, 옥수수밭은 비로드처럼 부드럽게 푸르고, 먼 오대산 연봉의 기상은 웅장하고,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도처에서 내와 개울을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 땅 어디메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으랴. 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뿌리내리기 힘든 고장인가.


주인공은 돌아오는 길에 조카를 ‘이 땅에 뿌리내리기 가장 쉬운 무난한 품종’으로 키우는 것이 빗나간 것을 자인하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혼란을 느낀다.


소설은 ‘카메라’와 ‘워커’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데다, 감동적이고 생각할 거리도 많아 참 좋았다. 제목 ‘카메라와 워커’는 주말 여가를 누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중산층의 삶과 한군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삶을 각각 상징하는 것 같다. 


고(故) 김윤식 서울대 교수는 책 <내가 읽은 박완서>에서 “카메라 쪽으로 키우려다 워커 쪽이 되고 만 사실에 직면해 스스로 ‘혼란’을 느끼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의 감동의 원천”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2012년 박완서의 마지막 소설집 <기나긴 하루(문학동네)>에 박완서 단편 중 단 한 편을 추천할 때도 <카메라와 워커>를 추천했다.


옥수수는 이 소설에서 주변 풍경 스케치에 쓰인 소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다만 위에서 인용한 대로 옥수수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옥수수는 척박한 땅에서도, 어디서나 잘 적응해 뿌리내리기 쉬운 대표적인 작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옥수수처럼 조카를 ‘이 땅에 뿌리내리기 가장 쉬운 무난한 품종’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확인한 고모의 안타까움을 다루고 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찾은 오대산 월정사 입구는 야생화 애호가들에겐 낯익은 곳이다. 우선 한국자생식물원이 있어서 필자도 여러 번 찾은 곳이다. 또 늦봄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선재길에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배경으로 환상적인 산철쭉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그곳 어딘가 숲속에서 여왕처럼 도도하게 핀 백작약을 보기도 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미륵암 가는 길엔 순백에 가까운 흰금강초롱꽃이 있어서 꽃쟁이들이 때맞추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옥수수는 열대 아메리카 원산으로, 아메리카 대륙 인디언들의 주식이었다. 쌀·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 작물 중 하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옥수수를 스페인으로 가져가 유럽 전역에 퍼트렸다. 이것이 16세기 들어 중국과 인도, 우리나라까지 전해졌다.


옥수수는 수꽃과 암꽃이 한 그루에 있다. 수꽃은 줄기의 맨 윗부분에 삼각형으로 늘어지듯 달리고 암꽃은 아래쪽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옥수수 같은 풍매화 식물에게 중요한 것은 자가수정을 피하는 문제다. 옥수수가 쓰는 방법은 시간차 성숙이다. 수꽃이 먼저 피어 꽃가루를 날린 다음 약 이틀쯤 후 암꽃이 성숙해 남의 꽃가루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부분이 바로 암꽃차례다. 이 암꽃차례는 아래쪽 잎겨드랑이에 포에 겹겹이 싸여 있다. 길게 나와 있는 수염이 암술대다. 수염을 따라가면 옥수수 알곡 하나하나로 이어져 있다. 암꽃들이 주머니 속에 싸여 있으니 꽃가루받이를 하려면 이렇게 길게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 책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옥수수는 꽃이 피기 전 쓰러지더라도 혼자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뿌리가 있던 곳에서 세 마디쯤 위쪽에서 줄기를 뺑 둘러서 굵은 뿌리가 나오는데, 기울어져 있는 부분의 뿌리가 굵고 길게 나와 뻗으면서 줄기를 받쳐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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