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역사] 세종대왕과 스승의 날

2024.05.20 09:00:05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1958년 5월 강경여고의 동아리, 청소년적십자단(RCY)은 현직 선생님, 퇴직 선생님, 몸이 불편한 선생님들을 방문했다. 청소년적십자 충남협의회는 강경여고 청소년적십자단의 활동을 뜻깊게 생각하고 1963년 9월 21일을 충남 지역에서 ‘은사의 날’이라 해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날로 정했다. 1964년부터는 5월 26일로 날짜를 바꿔 '스승의 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한글을 창제한 민족의 스승 세종대왕의 탄생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는 “태조 6년(1397) 4월에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였으니”의 탄생 기록에서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준수방은 어디일까?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로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인왕산의 물줄기가 청운동과 옥인동으로 흐르다 만나는 곳이다.

 

현재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 9길을 지나면 인도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 하나만이 있다. 이곳에 기념관이나 생가라도 복원했으면 한다.

 

 

 

 

 

여주 영릉

 

여주에 있는 영릉은 원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에 있었다. 세종대왕이 항상 아버지인 태종의 옆에 있고 싶어 해 태종의 묘인 헌릉 옆에 모신 것이다. 그러나 묘의 위치가 좋지 않다고 해 예종 1년(1469)에 묘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왕명을 받은 관리들이 터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어느덧 여주 칭성산(지금의 영릉이 있는 산)에 이르렀다. 이때 비가 내려 피할 곳을 찾는 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어서 가보니 묘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이었다. 그곳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다. 이인손은 죽음에 임해 아들 이극배에게 무덤을 쓴 후 꼭 지켜야 할 두 가지를 당부했다.

 

“개울에 다리를 만들지 말고, 재실을 짓지 말라.”

 

이극배는 이를 어기고 재실을 지어 묘터를 찾던 관리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이인손의 후손들은 묘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들어주었으며, 예종은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켰다. 이인손은 자신의 무덤이 이장될 것으로 생각해 지석(誌石) 아래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대비책까지 준비해 놓았다. 후손들은 이인손의 뜻대로 연을 날려 떨어진 곳인 세종대왕면 신지리에 묘를 쓰니, 그 자리도 명당이어서 이후 가문에서 5명의 정승이 나와 계속 번성했다고 한다.

 

영릉의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과 세종대왕 때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 천문과학기기인 간의, 천체관측 기구인 혼천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앙부일구는 ‘시계의 모형이 솥을 받쳐 놓은 듯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림자를 받는 면이 오목하다고 해서 오목 해시계로도 불린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는 한글 창제, 각종 과학기기 발명, 북쪽 국경선의 확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관에서 나와 영릉으로 가다 보면 자격루가 있다. 물시계라고도 하는 자격루는 매시간 동물들이 나와 시간을 알려주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시계이다.

 

 

서양의 카스틸리오네가 발명한 것보다 200년 앞서 만들어진 측우기도 있다. 농사짓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에 설치한 수표도 보였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과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을 지나면 봉분이 나타난다. 봉분 둘레는 12면으로 나누어져 각각 12가지의 동물을 새겨 방향을 표시했다. 봉분 앞에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임을 알려주며,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는 양(石羊)과 호랑이(石虎)를 돌로 조각해 능을 지키게 했고, 그 앞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다.

 

 

강과 절의 만남

 

영릉에서 여주대교를 건너면 봉미산 속에 신륵사가 있다. 신라시대에 지어진 신륵사는 고려 우왕 때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해졌다. 신륵사의 유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자주 말이 날뛰었는데, 하도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이때 나옹스님이 신의 힘을 빌려 굴레(말이나 소의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은 줄)를 씌워 말이 순해졌다. 그래서 귀신 신(神)과 말에게 굴레를 씌웠다는 륵(勒)을 써서 ‘신륵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신륵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쇠퇴하다가 영릉이 세워지면서 큰 사찰이 되었다. 임금이나 왕비가 죽으면 릉 부근에 원찰(願刹)을 세워 임금과 왕비가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고 제사를 지냈다.

 

세종대왕의 묘가 여주로 이장되면서 대대적으로 절을 크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에 타서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그 후에 지어진 것이다.

 

신륵사에는 신륵사 다층전탑이 있다. 벽돌로 쌓은 탑이라 벽돌 ‘전(塼)’자를 써서 ‘전탑’이라 했다. 전탑은 불교 전래 당시 나무로 만든 목탑이 석탑으로 발달하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탑이다. 불상이 없었던 시기에 부처님의 사리를 탑에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렸기에 불상을 만들기 이전에는 탑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신륵사 다층전탑은 남한강과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지켜주는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에 홍건적이 침입해 큰 피해가 있었다. 홍건적이 무서워 모든 사람이 피난을 가도 오직 나옹스님만이 신륵사를 지키고 있었다. 신륵사에 들어온 홍건적은 나옹스님의 위엄에 놀라 도망간 이후 나옹스님의 이름은 고려에 널리 알려졌고 2000여 명의 제자를 키웠다. 신륵사에는 나옹스님이 머물러 관련 유적도 남아있다. 조사당을 뒤로 하고 소나무 숲을 따라 계단을 오르니 석종부도와 석종비, 그리고 석등이 있다. 나옹스님의 사리가 있는 부도로 종을 닯았다고 해 ‘석종부도’라고 한다. 다른 스님들의 부도탑과는 달리 높은 기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종부도 앞에는 나옹스님께 존경을 표하기 위해 꽃이나 향을 바치는 팔각형의 석등이 있다. 석등은 연꽃이 받치고 있어 고려시대의 화려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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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보기)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1443) 7월 19일 내용을 보면

 

전라·경상·충청도 관찰사에게 전지하기를, ‘(전략) 여러 신하의 의논도 일치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바라는 것도 역시 각각 다르다.(중략) 내가 궁궐 속에 있으므로 민간의 일을 알지 못하니, (중략) 민간에 물어서 백성이 바라는 것으로 가부를 살피고자 하나, (중략) 각 고을 수령들과 여러 사람의 뜻을 참작하고, 자기의 의견도 합하고, 각기 경내 백성의 바라는 것과(중략) 의논을 더하여 밀봉해서 아뢰라.’ 했다.

 

<세종실록>의 기사를 보고 알 수 있는 세종대왕의 백성들에 대한 생각은?

 

(해설은 다음 회에)

 

전회 해설)

 

진린이 왜군의 회유로 이순신 장군이 단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 전쟁을 계속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 기회에 왜군을 섬멸해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왜군은 제국주의의 길을 가게 되는 19세기 후반까지 조선과 평화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민병덕 매헌윤봉길기념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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