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는 폭력교사였다

2005.11.14 09:54:00

J군!
창 밖에는 조용히 가을비가 오고 몇 잎 남지 않은 가릉 단풍들이 그나마 찬서리에 오그라붙어 갈 길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며 그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네그려. 1982년 고흥에서 선생과 제자로 만난 우리들의 인연을 잊지는 않았을까?

교단 3년 차의 초보 선생이었던 나는 40명에 가까운 6학년을 처음 가르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했었다는 걸 세월이 흘러가며 통감하였다네. 잘 해 보겠다는 욕심이 지나쳐서 상처를 많이 주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의 벽 앞에서 늘 미안한 마음이었네.

그대는 우리 반의 반장이었으며 잘 생긴 외모에 축구를 참 잘 하였지. 점심 기간에 2층 교실에서 내려다 보면 온갖 발재간을 부리며 축구공을 잘 다루던 그대의 모습에 감탄을 하곤 했었지. 80년대에 유행했던 바람머리에 날렵한 축구화를 신고 특히 노란 셔츠를 즐겨 입었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군.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네. 축구 선수로 클 거라고 확신했는데 고등학교까지는 무사히 선수의 길을 걸었다는 걸 알고 있네. 그대로 컸다면 지금쯤 국가 대표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재주를 가진 그대였음을 익히 알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국가 대표로 뛰었던 K선수와 고등학교 시절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었다더군.

기량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는 풍문에도 불구하고 선수의 길로 가지 못한 데는 내 잘못이 큰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네. 어쩌면 나의 충고가 딱 들어 맞은 것만 같아서 말이네. 재치있고 인기도 많던 그대에게는 꼭 고쳐주고 싶은 것이 있었지.

자기 잘못을 얼른 인정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성질 말일세. 나는 그걸 내 힘으로 고쳐주려고 노력했었고 나와 부딪치는 일이 생겼지. 사춘기까지 겹쳐 있던 그대의 고집스런 심성을 나무라는 내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아서 아이들 앞에서 감정이 앞선 내가 그만 매를 들었던 일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네. 2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에 나는 그대에게 무시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매를 들어서라도 고쳐주지 않으면 훗날 크게 후회할 거라며 우리 반 앞에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었지. 대답이 나올 때까지 아마 20대 쯤은 때린 걸로 기억되네. 잘못을 고치겠노라는 대답을 들은 것 같지는 않고 내가 포기한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네.

J군! 그대는 담임인 나를 가장 잘 도와주는 제자였고 나의 부탁이라면 서슴지 않고 먼저 달려왔었지. 심지어 내가 첫 아이를 가져서 학교 밖에서 자전거로 통근을 할 때에도 가끔 나를 태우고 다닐만큼 나를 위해 주었던 소년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네.

막내로 자란 그대가 부모님께 말대답을 하고 버릇없게 군다는 소문을 듣고 야단을 치는 과정에서 매를 들었다고 생각되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야단치는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네. 사춘기 소년이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서 고집을 부린 것을 오해하고 폭력을 휘두른 잘못. 혼자 데려다 조용히 충고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렇게 후회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그대를 그렇게 심하게 때린 이후로 제자들을 감정으로 때린 기억이 별로 없네. 그 때 너무 창피하였고 나 자신의 무능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대의 동창들과는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그대는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고 친구들을 통해서 그대의 소식을 접하는 걸 보면 아직도 그 때 내가 휘두른 몽둥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나는 그 때 그랬었지. '그 고집을 꺾지 않으면 먼 후일 후회할 거라고. 중요한 일을 그르치거나 인간 관계를 맺는 일에 어려움을 느낄거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고 자존심을 세워서 손해 보는 일을 만들지 말라고. 때려서라도 고쳐 주고 싶다고.'

J군! 25년 교직 생활 중에 가장 미안한 이름으로 기억하며 매를 들어야 할 순간마다 초보 시절 겁없이 매를 휘둘렀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나를 다독였네.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말로 다스리는 버릇을 갖게 해준 그대는 내게는 반면교사인 셈이지.

요즈음 처럼 '교원평가'로 세상의 눈총을 받는 이 자리에 있으니 그대 생각이 더 나는구만. 대화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충고해 주지 못한, 지혜롭지 못했던 내 행동이 아니었다면 그대가 원하는 축구 선수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 드는 걸 보니 나도 많이 늙어가는 모양일세.

가을 소풍을 가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모자를 쓰고 예쁘게 웃고 있는 소년. 자전거에 나를 태워 읍내를 가곤 했던 즐거운 추억보다 그대를 심하게 때린 기억만 또렷하니 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이렇게 공개 편지를 보내네. 어디선가 이 글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일세. 주소도 모르고 전화 번호도 모르는 지금. 그래도 내 잘못을 전하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하네.

아직도 나의 영상속에 보이는 모습은 6학년 소년이 모습만 남아있는 지금. 버릇처럼 고집 센 아이들이나 대드는 제자들을 대할 때면 그대 모습을 떠올리네. 다시는 때리고나서 후회 하지 말자고. 교직 경력이 많아질수록 매를 드는 일조차 없어지는 걸 보니 매를 드는 것도 어찌 보면 열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자신에게 해보네.

오랜 동안 6학년을 맡아서 속 썩이는 아이들이나 이죽거리는 아이에겐 체벌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정도의 매를 드는 날은 속이 상해서 수업조차 하기 힘들곤 했는데, 이제는 내거 먼저 포기한 탓인지, 그마저도 말로 대체하게 되었네. 이제는 아이들과 내가 온전히 친해진 상태가 아니라면 손바닥조차 때리지 않는 소심한 선생이 되고 말았네.

J군!
비록 자신이 가고자 했던 축구선수의 길은 가지 못했더라도 살아보면 가치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기르며 아기자기하게 사는 일, 삶의 자리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도 아름다운 것이며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다만 이렇게 못난 선생처럼 먼 후일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네.

깊어가는 가을 앞에서 시끄러운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제자의 일상이 궁금하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 나를 자판앞으로 끌고 왔네. 23년 동안 전하지 못한 내 미안함이 시공을 초월하여 서울 하늘에 닿을 수 있기를 밀려가는 구름에게 부탁하며 아무쪼록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 속에서 행복한 나날이 되길 빌겠네.

사랑하는 J군!
23년 전 그대에게 휘두른 몽둥이는 돌아와서 내 가슴에 꽂혀 있네. 그 때도 때린 일을 사과했겠지만 내 마음은 지금도 미안하다네. 부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몸조심 하시게. 다른 친구들과는 연락이 되고 있으니 꼭 한 번 보고 싶네.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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