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세월과 동창생, 그리고 선생님

2005.12.23 13:24:00

눈만 뜨면 학교밖에 모르는 사내. 그 흔한 친목계 하나도 없이 주말에도 학교에만 나가는 고지식한 아저씨. 엄연히 처자식이 딸린 한 집안의 가장이면서도 가족들은 제쳐두고 허구헌날 대학입시에 저당잡힌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돈키호테같은 남자.

아내의 눈에 비친 남편은 몹시 위태롭다. 자칫 학교밖에 모르는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며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느끼는 모양이다. 친구들의 남편은 연말연시가 되면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여 친분 관계를 쌓느라 바쁜데, 이 양반은 풀방구리처럼 학교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다른 모임은 안중에도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아내는 요며칠간 전화를 걸어온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번만큼은 동창들에게 얼굴을 비치고 오라며 성화를 부리다 못해 애원까지 한다. 마침 정시모집에 지원한 학생들과의 상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였기에 못이기는 척 아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날도 아이들과 상담하느라 십여분 정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자 서른명 남짓한 중년의 남녀가 빙 둘러앉아 식사와 함께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실로 30년만에 처음으로 나가는 동창회였다.

가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세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마의 주름은 기본이고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거나 모근(毛根)이 뽑혀나가 민둥산을 이룬 친구들도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반가운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어색했던 분위기도 짐짓 누그러들고 어느덧 삼십년 전의 동심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했다. 세파에 시달려 무딜대로 무딘 중년의 마음을 이어주는 이야깃거리는 단연 선생님이었다. 저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선생님에 대한 추억의 보따리를 끌러내자 분위기는 점차 깨소금을 볶는 듯 했다.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상영이.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들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던 녀석은 삼십년만에 만난 친구의 손을 잡고 무척 반가워했다. 선생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친구는 대뜸 박달나무로 엉덩이를 맞았던 얘기부터 꺼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교칙을 밥먹듯이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틈만나면 겻길로 빠지려는 자신을 엄하게 꾸짖고 사랑의 매로 다스려준 선생님이 그렇게도 고마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자리를 파할 무렵이 되자, 상영이는 선생님이 된 친구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안으며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맘때면 통과의례처럼 겪게되는 성장통을 들어주고 이해하며 잘난 아이보다는 못난 아이의 손을 한번이라도 더 잡아주고 눈을 맞춰주며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을 전해주는 어버이같은 선생님이 되어달라고 신신 부탁했다.

30년만에 만난 동창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과연 지금의 아이들도 우리 세대처럼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들을 가르쳐준 선생님들을 그리워할런지. 선생님을 일일이 평가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선생님을 고르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쓴소리로 잘못을 일깨워주고 옳은 길로 인도해준 선생님을 얼마나 고마워할런지. 행여 자신들이 메긴 점수를 놓고 왈가왈부하지는 않을런지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병술년 새해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당장 내년부터 선생님들은 동료교사는 물론이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평가라는 시험대에 올라야한다. 과연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소신있게 교육활동을 펼칠 선생님이 얼마나 될런지. 말 그대로 스승은 없고 직업인으로서의 선생만 득세한다면 지식을 사고파는 학원강사와 무엇이 다를런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사회활동도 접은 채 음지에서 아이들만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선생님들을 격려는 못할망정 흠집내기에만 바쁜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진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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