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보고 싶은 아이들

2006.01.03 09:50:00


2006년 1월 2일. 방학을 맞은 지 첫날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빈 교정엔 찬 바람이 일고 낯익은 까치 소리만 들립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아이들 목소리들, "안녕하세요" 선생님!"하며 교실문을 들어설 것 같은 착각에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빈 학교를 새들과 함께 지키는 하루는 어느 때보다 해가 깁니다. 시원스레 옷을 벗은 벚나무들은 겨울 바람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겨울을 만끽하고 서서 가끔 찾아오는 까치들과 새봄을 약속합니다. 벌써부터 양지 바른 화단엔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꽃씨를 날리는 모습을 선보이며 아이들보다 먼저 봄을 안고 서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엔 아직도 2005년의 잔영들이 더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빠서 기사조차 내보내지 못한 학년말을 보내고 이제야 이 곳에 들러 리포터로서 숙제를 합니다. 작은 칠판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미주알고주알 써 놓고 간 사랑의 언어들이 혼자 있는 나를 달래고 있답니다.

내 얼굴보고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던 꼬맹이들이 나 몰래 숨어서 써 놓고 간 카드며 낙서(?)들이 겨울방학 내내 교실을 지켜 주며 주인 노릇을 하겠지요? "선생님,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1년 동안 감사합니다. "를 비롯해서 색깔 자석으로 하트 모양을 배열해 놓고 간 녀석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집니다.

12월 31일 방학하던 날, "우리 1, 2학년에게 선생님이 참 미안했어요. 선생님은 오랜 동안 언니들만 가르쳐서 1. 2학년 친구들에게 잘 해 주는 방법을 몰라서 여러분을 재미없게 가르친 것 같아요." 했더니,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던 의젓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니예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 때문에 많이 웃었는데요?"하던 서효. "저도 참 즐겁게 공부했어요."하던 진우. 한 쪽에서 혼자 '나도 좋았는데'하고 중얼거리는 찬우, 말대신 내 품에 안기며 행복했었다는 2학년 나라, 송아지 눈처럼 큰 눈을 하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눈웃음 짓던 은혜는 아무 말 않고 웃더니, "은혜는 어땠니?"하고 물으니 수줍은 얼굴로, "저도 참 좋았어요." 한다.

"그래, 선생님은 우리 은혜가 받아쓰기를 아주 잘 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단다. 방학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선생님이 내준 받아쓰기를 꼭 할 수 있겠지?"

겨울방학을 하는 게 재미없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내몰듯 집으로 보내고 부랴부랴 본교로 내려가던 방학식날. 우리 아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지키지 못한 게 미안해서 2006년 2월에는 제일 먼저 탁구부터 배워 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내내 미안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호기심은 형들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들이었는데, 번번히 이런저런 일들로 미루고 교과 공부에만 치중한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금방 나를 이해해주고는 괜찮다며 의젓하게 대답을 하던 방학식날이었습니다. 부르면 "예'라는 대답대신 "응"하던 찬우도 이젠 제법 자라서 똘똘해졌고 받아쓰기를 힘들어하던 은혜도 이젠 받침 글자 하나 정도만 틀릴 정도로 좋아져서 2학년으로 올려보내는 내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무엇보다 1학년 동생들에게 선생님을 많이 양보해 주며 혼자서 의젓하게 공부를 잘 해 준 2학년 나라는 보통 아이가 아니랍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앞서가는 아이라서 복식학급에서 겪는 선생님의 어려움을 반감시켜준 똑똑한 우리 나라는 사고력이나 학업성취 능력이 대단해서 1년 동안 나를 기쁘게 해준 아이랍니다.

오랜 동안 습관처럼 고학년에 길들여진 20여 년의 교직생활을 돌아보니 2005년처럼 많이 웃었던 해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는 언어들은 시어 수준이었고 동화속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에 감동하고 설레고 울고 웃는 귀여운 다섯 명의 천사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건강하게 지내다 오라고 한 번씩 안아주는 것으로 짧은 인사를 대신하던 날. 이제 보니 아이들을 만나 행복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켜던 순간들도, 아이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을 만들어 날리던 신기함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아, 겨울방학 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키도 쑥쑥 자라렴. 좋은 책도 많이 읽고 마음의 키도 같이 키우렴. 나무들은 겨울에는 쉬지만 예쁜 아이들은 겨울에도 쑥쑥 키가 큰단다. 부디 건강하게, 아름답게, 긴 방학을 잘 보내고 오렴.멀리 계신 엄마를 만나 좋은 시간도 보내고 키워주시느라 고생하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효도도 많이 하렴.'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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