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좀 천천히 달리렴

2006.02.02 15:09:00

나를 움직인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 사춘기가 시작되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아는 것이 힘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가난해도 길이 보인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주경야독의 길을 걸으며 살았던 청년기에는 성경의 잠언들이 나를 비추는 등불 역할을 해주었으니 사람보다는 책에서 얻은 영감들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냉대로 삶이 힘들 때마다 나에게 주문을 걸곤 했던 문장들은 가족과 친구를 대신해 주곤 했었다. 가까이는 소로우의 <월든>에서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한마디는 나를 각성시켜 주는 문장이었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일은 몸 고생보다 마음고생을 하던 때였다. 30여 년 전 서울에서 일을 할 때 도둑의 누명을 쓰고 한 달 가까이 절망 속에 일을 할 때 만났던 문장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광선은 비록 더러운 곳을 통과할지라도 오염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침은 그대로 나를 안심시켜 의연하게 살 수 있는 백만 대군의 원군이 되어 심장에 꽂혀 내게 힘을 주었던 것이다. 한 달 뒤에 범인이 내가 아니라 사장 집 가족이었음이 밝혀졌을 때도 원망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었던 마음의 여유는 바로 그 문장에서 비롯되었으니 책은 내 인생에서 늘 스승이었다.

사람에게 실망을 할 때 입버릇처럼 성경 구절을 떠올리면 이내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코로 숨쉬는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또는 일터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절망을 할 때에도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80%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며 하루 중에 걸려오는 이동전화의 80%는 만나고 싶은 사람 20%에게서 걸려온다는 통계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잘 받는 내 마음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나 보다. 육신의 나이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내달리기 바쁜데 철없는 마음은 아직도 세상에 익숙하지 못해서 작은 일에 주춤거리고 뒤돌아보며 사람만나기를 두려워한다. 사람보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퇴행성 심리가 아닌가하고 스스로 걱정하기도 한다.

대학생인 두 남매가 군대에 가고 직장에 나갈 만큼 자랐건만 나는 아직도 친부모님과 시부모님이 다 안 계셔서 설날이 주는 서늘한 서글픔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째 우울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 속으로 도피하거나 부엌살림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청소하며 피곤할 정도로 나를 혹사시켰다.

원하는 학업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없어 힘들 때에도 좌절할 시간마저 아까워하며 잠자는 시간까지 재며 살기 위해 달렸는데, 이제 배고픔을 해결하고 제 속도를 내며 안정적인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인생의 도로에서 만난 장애물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걸 가리켜서 중년의 빈 둥우리 증후군이라고 하거나 우울증의 시초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 직장에 출근하는 딸아이가 늦었다고 투덜대면서도 이 옷 저 옷 입어보며 식사시간까지 아끼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교차했다. 처음 가진 직장에서 일을 배우느라 야근을 하며 자정에야 잠자리에 든 녀석이 안쓰러워 최대한 잠을 많이 자도록 시간에 딱 맞게 깨워준 어미의 속도 모르고 투덜대다니.

`깨죽 한 컵 마시렴. 엄마가 얼른 차로 데려다 줄 테니 어서 챙겨라.`

이제 한 달 후면 저 아이를 두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멀리 강진으로 부임지를 옮길 것이니 출근하는 녀석에게 아침밥조차 챙겨줄 수 없는 내 마음은 다시 아파온다. 저 아이에게 아침밥을 제대로 먹이며 키운 기억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 다시 애꿎은 눈물샘만 자극하고 말았다. 1년 이상 홀로 끼니를 해결하며 나를 기다려 온 나이든 남편과 직장으로 출근하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나는 처음으로 복제인간을 꿈꾸었다. 나를 복사하여 원본은 남편 곁에 두고 복사본은 딸아이 곁에 두었으면 좋겠다는 유치원 아이 같은 생각을!

내 마음 속에서는 다른 말이 나오려다 말고 안에서만 옹알였다.

`아가야! 그렇게 달리고 살아봐도 인생에 남는 것은 별로 없더구나. 아니,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치열한 시간을, 아까운 시간을 다 바치지 않아도 된단다. 앞만 보고 그렇게 달려온 엄마처럼 살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생활을 위해서 네 젊음을 송두리째 보내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단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단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생존만을 위해 살았으며 삶 자체를 위해,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뜨겁게 살아보지 못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살아온 길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것이 최선의 길인 양 질문도 하지 않고 달려갈 딸아이의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마 그도 나처럼 실컷 달리고 난 다음에나 나처럼 안개를 벗어났을 때쯤이면 시간이 아깝다고 말할지 모른다.

좀더 많이 산들을 바라보고 냇물소리를 들으며 강아지나 고양이와 더 눈을 맞추며 아기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해넘이를 보고 달님을 맞으며 자신의 내적 언어에 좀더 예민하게 두 귀를 세울 수 있기를, 입과 몸의 만족보다 영혼의 키를 높이는데 마음을 쓰며 살 수 있기를! 아가! 좀 천천히 달리렴. 목적지에 빨리 가려고 달리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을 너무 많이 놓치거나 아예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특히 자연의 친구들을 더 소중히 하였으면 참 좋겠구나.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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