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를 보며 희망을 읽다

2006.02.21 13:50:00


이 맘 때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하여 크게 낙심하는 학생들을 봅니다. 또한 소망하는 직장에 취업이 되지 않았다 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젊은이들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거센 눈보라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그루 겨울나무 같아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이번에 얻지 못했다고 해서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허탈하고 자존심 상하고 아프고 쓰라린 마음을 어디에 견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눈물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웅크리고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엄동설한과 소리없이 맞서 싸우고 있는 저 겨울나무들의 속내를 한번 마음의 눈으로 읽어보기 바랍니다. 동시에 마음의 귀로 그들의 목소리도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자연은 늘 우리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달려가면 언제나 반겨주는 고향집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저도 오늘 밖에 나가 겨울나무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그에게서 한 수 배웠습니다.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루하고 지친 표정의 거무튀튀한 나뭇가지, 말라붙을 대로 말라붙어 꼭 죽어 있는 것만 같은 겨울나무, 마치 저승길을 며칠 앞둔 병자의 얼굴 같았습니다. 겉보기엔 분명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낙오자,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기야, 지난 가을 그토록 아끼던 잎새들과 열매들을 다 잃어버린 빈털터리에게 무슨 소망이 남아 있으리오? 그냥 콱 죽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 그럴 뿐이었습니다. 얼음장 밑 물고기처럼 이 북풍한설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숨을 내쉬는 것은 그나마 겨울나무에게도 희망이라는 피가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우내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나무는 결코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눈을 감았으나 속눈은 뜨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호흡이 멈춘 줄 알았는데, 적어도 그렇게 보였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는 춥고 긴 겨울 동안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묵언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가부좌를 튼 채 장기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나무는 추위 속에서도 새봄을 잉태하여 몸 안에 키우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한번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움이 트나요? 가장 여리고 약한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꽃이 피나요? 역시 가지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서 꽃이 핍니다. 그리고 열매는 어디에서 맺히나요? 꽃잎이 떨어져나간 바로 그 아프고 쓰라린 자리,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말씀처럼, '부드러움의 미학', '위대한 연약함의 역설'이 바로 이런 것일까요? 결코 튼튼해 보이는 둥치, 단단해 보이는 줄기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닙니다. 항상 가장 힘없고 나약하고 연약한, 그래서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하고 온유하여 남을 섬기는 자세가 된 가지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며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선택된 여린 가지에서 움이 돋고 잎에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어쩌면 가장 약할 때가 가장 강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겨울나무처럼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가장 빛나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지금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떤 모양으로 다듬어지게 될지 그건 주님께서 아실 겁니다. 지금은 아프고 힘들지만, 모난 부분을 깎고 다듬고 나면 난 훌륭한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있겠죠? 그래서 참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내기로 했습니다."(리포터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주보에서 옮긴 글)

이 글처럼 여러분도 단련 중이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으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성구(욥기 23장 10절)가 떠오릅니다.

다시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나무는 알몸으로 새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린 나뭇가지마다 용솟는 꽃망울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 같습니다.

지난해 가을….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무성한 잎새와 탐스러운 열매들을 모두 떨어버리고 하얀 된바람에 속절없이 눈물 흘렸을 겨울나무…. 그러나 나무에게는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미 몸 안에는 새로운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알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넉넉히 이겨낸 것도 어쩌면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새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얼마나 나무와 닮은꼴일까?

겨우내 나무는 뼛속 깊이 밀려드는 추위를 알몸으로 맞서며 목숨 건 한판 싸움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릎을 꿇었으나 아주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진 한판 승부, 곧 무혈혁명, 명예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멀지 않아 겨울을 밟고 일어선 나무들의 환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고행 끝에 터지는 파안대소요? 백일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수도자의 얼굴이 아닐까요? 나무는 겨우내 와신상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박박 이를 갈지는 않았습니다. 성급하게 서둘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히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기회를 놓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보란 듯이 봄 햇살과 함께 터져 오르는 봄꽃의 함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형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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