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인가, 한 번은 밖에 나가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서…. 나무는 알몸으로 새 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용솟는 꽃망울이 마치 살구씨만큼 부풀어오르는 사춘기 소녀의 젖가슴 같았습니다.
지난해 가을….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무성한 잎새와 탐스러운 열매들을 모두 떨어버리고 하얀 된바람에 속절없이 눈물 흘렸을 나무….
그러나 나무에게는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미 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알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넉넉히 이겨낸 것도 어쩌면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새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얼마나 나무와 닮은꼴일까?
새들은 알을 낳고는 대개 가슴털을 뽑아 둥지 안을 푹신푹신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미새가 잠깐 잠깐 자리를 비워도 어미새의 따스한 가슴이 둥지 안을 맴돌고 있기 때문에, 마침내 껍질을 깨고 새가 부화하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나무도 그런 것은 아닐까요? 겨울이 오면 두껍게 옷을 입는 인간과 달리 입었던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나무. 나목(裸木)으로 겨울을 나는 것이지요. 나무가 떨어버린 잎새들은 어미새의 깃털처럼 낙엽이 되어 대지를 체온으로 감싸고….
낙엽을 헤치고 흙을 파보니 세상에! 그 속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 되고 있었습니다. 새싹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흐르고 고기가 노니는 것처럼….
겨우내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나무는 결코 겨울잠을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속 눈을 뜨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보라 속에서 호흡을 멈춘 줄 알았는데, 적어도 그렇게 보였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는 춥고 긴 겨울 동안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묵언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가부좌를 튼 채 장기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밀려드는 추위를 알몸으로 맞서며 목숨 건 한판 싸움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릎을 꿇었으나 아주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진 한판 승부, 곧 무혈혁명, 명예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겨울을 밟고 일어선 새 봄의 꽃과 나무들을 보십시오! 깨달음 끝에 터지는 파안대소가 아닙니까? 백일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수도자의 얼굴이 아닙니까? 나무는 겨우내 와신상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박 이를 갈지는 않았습니다. 성급하게 서둘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히 때를 기다렸을뿐….
기회를 놓치지도 않았습니다. 봄 햇살과 함께 터져오르는 봄꽃의 함성을 보십시오! 얼마든지 나무들도 잎사귀 없이 만세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