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 들어간 지도 일주일이 되어간다. 새해가 되면서 아이들은 문자를 통해 새해 인사를 해왔다. 졸업생도 있고 올해 우리 반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오늘 나를 돌아보게 하는 문자 하나를 받았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허리 아픈 건 좋아지셨고요? 그런데 선생님 일 년 동안 제 이름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아세요?"
아이의 약간은 도발적인 질문을 받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곤 생각해보았다. 문자를 보낸 아이와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얼마나 불러주었는지.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돌아보니 어떤 아이는 여러 번 이름을 불러주었고, 어떤 아이는 겨우 몇 번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문자를 보낸 아이를 떠올려봤다. 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얼굴을 마주치면 슬며시 눈길을 피하기도 했던 아이였다. 그럴 때마다 "왜 눈길 피하니?"하며 말을 붙였던 아이였는데 오늘 뜬금없이 이런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 아이의 문자를 받고 이런 답을 해주었다.
"글쎄다 열다섯 번 정도.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이 왔다. 그런데 그 답은 나를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하는 힐책 같은 거였다.
"아니에요. 일곱 번이에요. 선생님이랑 많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 ^ 조금 서운했어요.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아니, 일곱 번이라고. 일 년 동안 겨우 일곱 번이라니. 설마했지만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었다. 그 아이한테 미안한 맘이 들어 바로 답장을 보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넘 무관심했나 보다. 미안. 방학 잘 보내구."
교사는 정거장이라는데...
그 아이의 문자를 받고 답을 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아무도 몰래 바위틈이나 눈길이 잘 미치지 않은 곳에 핀 작은 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아주길 기다린 여린 꽃인지 몰랐다. 여태껏 누구한테도 크게 관심을 받아보지 못한 탓에 누군가의 관심을 항상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접근하는 성격도 아닌 탓에 그냥 조용히 피었다 졌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잘 눈에 띄지 않은 꽃이라 해서 조금은 소홀히 한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조용하고 말없이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에게 부러 말을 걸곤 한다. 내 학창 시절이 생각나서이다. 초·중·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난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중학교 땐 나 같은 아이가 교실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래선 학년을 마칠 때까지 담임선생님하고 말 한 마디도 없이 학년을 끝낸 적도 있었다. 특별히 튀지도 않고, 아주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는 아이가 말마저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학년이 끝날 때마다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어쩌면 나에게 문자를 보낸 그 아이도 그런지도 몰랐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교사는 정거장이라고. 지치고 힘든 아이들이 쉬어가는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 교사라고.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정거장은커녕 만원버스가 되어 아이들을 이리 밀고 저리 끌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난 그 아이에게 충분한 정거장이 되지 못한 것 같다. 그 아이가 이야길 하고 싶을 때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지 못했고, 그 아이가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할 때 모른척 했다. 비록 고의는 아닐지언정 결과는 그랬다.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자주 이야길 나누고 이름을 불러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이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간다. 그런데 이번 나에게 문자를 보낸 아이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이름자를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는 아이도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그걸 묵과하고 덤덤히 지나친다는 사실도. 그러면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한 아이의 존재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해주는 것임을 그 아이를 통해 배우고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