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비함을 갖고 있다. 간이역, 간이역, 간이역…. 몇 번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불러보자. 따뜻한 기운이 그리움을 불러내고 아련함을 불러내지 않는가. 사실 우리들 마음은 그렇게 작은 이름 하나에 움직이는 소박함을 갖고 있다." - 에필로그 중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간이역에서 내린 적이 있는가. 퇴색한 초가처럼 쓸쓸한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드는 그런 역. 잊혀진 세월처럼 덩그러니 서서 오고 가는 촌로들과 몇 명 여행객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간이역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아님 도시의 마음을 놓고 그저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간이역… 하고 몇 번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한 번 불러보라. 어떤 느낌이 드는지.
1년 전쯤 읽고 마음에 담아둔 책이 있다. 이정란의 <간이역 풍경>이란 책이다. 전국의 간이역을 둘러보고 그 간이역에 대한 단상과 삶의 모습을 맛깔스런 문체로 소담히 적어내려 간 책. 그 책을 읽은 후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든가, 승용차를 타고 이름 모를 간이역을 스쳐 지날 때면 책에서 글쓴이가 말하는 간이역의 마음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 그 느낌이 사라질 때면 종종 손에 들고 읽으며 6년 전의 여행을 떠올리며 속으로 미소 짓곤 했다.
그러니까 6년 전, 난 학생들 40여명을 데리고 전주에서 여수까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전주에서 새벽 1시 30(아마도)분발 통일호 열차를 타고 여수까지의 여행, 그 여행길에서 난 간이역을 처음으로 느꼈다.
모든 간이역마다 쉬는 통일호 열차는 어둠 속에서, 새벽 어스름 속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땐 그 존재를 깊이 사유하지 않고 그냥 떠나보냈다. 그러다 이정란의 <간이역 풍경>을 만났고 간이역에 대한 새로움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렇다면 이정란이 바라보는 간이역은 어떤 모습일까?
"역 앞 풍경이 절경인 간이역을 뽑으라면 구절리역이다. 한 폭 수채화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림 같다고 한 건 그림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과장되게 꾸며 표현했기 때문이다. 구절리역은 방금 붓을 떼어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한 폭 수채화이다."
정선의 아우라지역을 지나 구절리역을 지나면서 글쓴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간이역 풍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간이역엔 아름다움만이 있는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비에 젖은 기차표 예닐곱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주워서 날짜를 살펴보았다. 찍힌 날짜가 각기 다르다. 그게 왜 반다울까. 지금은 역 앞의 의자가 비어 있지만 얼마 전에 그 기차표를 들고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반가운 것이다."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의 살내음이 왁자하게 퍼졌을 간이역. 이젠 역무원도 없는 보성의 한 간이역에서 사람의 온기가 도는 차표 몇 장을 주워들고 글쓴이는 반가운 마음에 차표를 손에 꼭 쥔다.
간이역, 지금은 어쩌다 멈췄다 가는 역이 됐지만 예전엔 기다림이 있는 공간이었다. 사랑도 있었고, 이별도 있었고, 기다림도 있었고, 설렘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열차는 서지 않고 간판이 하나 둘 내려지고 있지만 예전의 간이역은 열차가 서고 간판에 고향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정란에게 간이역은 기다림의 줄을 놓지 않는 곳으로 다가온다.
"역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단선의 철길은 죽장에 삿갓 쓰고 길을 가는 선비 같은 모습으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간이역은 그런 곳이다. 기다리는 한 존재가 있으나 그이의 기다림은 중요하지 않다. 간이역에 몰아치는 회오리 속에서 쓸쓸함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이는 그래도 기다림의 줄을 끝내 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글에 나타난 간이역에 풍경만 나타난 건 아니다. 그 간이역에 걸쳐 있는 역사의 흔적도 보이고, 개인의 아픔 삶의 고백도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간이역 풍경>에 나타난 이정란의 글에선 쓸쓸한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도 위안을 준다.
그 위안에선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따스한 볕이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난 그녀의 글을 쓸쓸한 위안의 글이라고 하고 싶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쓸쓸하면서 따스한 모과향이 난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길을 떠나 보고 느끼고 사유했던 수많은 간이역이 내게 친근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