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봄비를 기다리는 아이

2007.02.22 07:34:00

겨울비 같은 봄비가 내립니다. 모처럼의 단비에 겨울 가뭄으로 헉헉거리던 대지가 촉촉하게 입술을 적십니다. 아침 일찍 아이들과 약수터에 가 물을 담아오는데 물이 잴잴거려 콜라병 하나에 오 분 정도 걸립니다. 가뭄 때문인지 약수터의 물도 마른 것 같습니다.

약수터에서 작은 산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 길엔 봉분 서너 개가 나란히 누워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봉분 옆 게딱지만한 밭엔 봄똥과 힘없이 땅바닥에 몸을 뉘인 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장난치며 걷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선생님, 저 민숙이요.”
“어, 민숙이. 그래. 근데 아침 일찍부터 웬 전화야?”

민숙인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던 아이인데 일 년에 한두 번 통화를 하는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는 일이라 좀 더듬거리자 민숙이가 왜 더듬거리냐며 핀잔을 줍니다. 그러면서 전화를 한 이유를 밝힙니다.

“저 엊그제 시험 봤어요. 그런데 불안해서요.”
“무슨 시험인데 불안해?”
“영양사 시험인데 면접까지 다 봤는데 괜히 불안해서 전화했어요. 이것저것 궁금하기도 하구요.”

한 명을 뽑는데 실험실습에 면접까지 보긴 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나 봅니다. 민숙인 자신과 함께 면접을 마쳤던 사람들과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열심히 노력했으니 잘 될 거야. 차분히 기다려 봐.’ 하는 말로 그 아이의 마음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와 전화를 끊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훈장 노릇하면서 제일 반갑고 기쁜 게 있다면 나와 함께 공부했던 아이들로부터의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잊혀질만하면 마른 땅의 샘물처럼 전화를 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는 소리를 듣다 보면 하루의 마음이 개운해지고 그 시절로 돌아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때론 아이들의 목소리나 사는 모습이 궁금해지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곤 합니다.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은 뭐가 바쁜지 연락이 잘 안됩니다. 어쩌다 연결이 되면 학교생활에 대해 좋은 소식, 안 좋은 소식들을 전합니다. 그리곤 의무적인 것처럼 맨 마지막엔 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생활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면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받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와서인지 모릅니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밤새 일하고 낮잠을 자다 전화를 받는 아이도 있습니다. 잠결에 받은 전화기 너머로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는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고 있었구나. 내가 깨웠나 보네. 다음에 다시 하마.’ 하면 그 아이는 전화를 끊을까봐 ‘아니에요. 저 다 깼어요.’ 하며 까르르 웃습니다. 그 아이들도 잘나지도 않은 선생의 목소리가 조금은 그리웠나 봅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소식이 궁금하듯 말입니다.

가끔 집에서 통화를 하면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꼭 애인하고 이야길 하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럼 ‘당신에게도 이렇게 해줄까?’ 하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칩니다.

봄은 겨울을 견디었을 때만이 온다고 합니다. 겨울을 견디지 못하면 봄은 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민숙이에겐 겨울일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는 민숙이. 민숙이에게 지금의 시련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그리고 기도해주세요.’ 하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민숙이에게 지금 내리는 봄비 같은 단비가 내리길 기도해 봅니다. 그리고 다시 밝은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오길 기대해봅니다.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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