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에는 언제나 설렘과 기대감이 있다. 새해는 한해의 출발로 의미가 깊다. 새로운 성취를 위한 도전으로 마음이 자못 부푼다. 나도 과거를 떨쳐내고 새 아침의 태양을 가슴에 품고 싶다. 큰 포부나 큰 소망이 아니라도 소중히 담아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작년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교원능력개발평가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평가는 어차피 점수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그 평가는 억울한 부분이 많다.
나는 올해 25년이 넘는 교직생활에서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수석교사다. 수석교사는 수업 전문성이 있는 교사를 선발해 그 전문성을 다른 교사와 공유하는 교원 자격체계다. 본인의 수업 이외에 동료교사의 수업과 연구를 지원하고 장학컨설팅 등 추가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당 수업시수도 경감되고 일정액의 수당도 받는다.
올해는 그래서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다. 명색이 수업전문가라는데 잘하지는 못해도 손가락질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동료교사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기 위해 말 한마디부터 몸가짐까지 신경을 썼다. 교실에 들어갈 때도 첫날부터 준비를 많이 했다. 이것저것 안 하던 것까지 했다. 한 장의 학습지를 준비해도 정성을 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자존심이 상한다. 세상을 살면서 험한 꼴을 많이 당하고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고민은 우습게 보인다. 아주 하찮은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으로부터 불신을 받았을 때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받았다면 마음의 상처는 깊다.
3년 전 교원평가 처음 시행될 때는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때는 학칙도 엄했다. 수업 중에 학습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호통을 쳤다. 생활지도도 엄하게 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선생님의 지도 행위를 수긍했다. 학교의 두발 및 복장 규정도 사회가 용인하고 있어서 반감이 없었다. 아이들이 지도를 잘 따른 것처럼, 선생님을 평가할 때도 대체로 좋은 분위기였다. 나도 역시 아이들을 엄하게 지도했지만 후한 점수를 받았다.
두 번째 해는 과도기였다. 학기 중간에 교육계에 큰 변화가 시작됐다. 학생인권조례가 선포되었다. 교육적 체벌도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생활지도에 대한 방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지만 그런대로 적응을 잘했다. 교원평가 점수도 만족했다.
올해는 많은 변화가 왔다. 아이들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학생인권조례를 체험했다. 그들은 학생인권조례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체벌 금지라는 울타리를 즐기고 있다. 학교생활도 자유롭다. 그와 함께 학생들은 학습 의욕이 없다. 학습에 집중하라고 해도 듣지를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르고 달랬다. 하고 싶지 않은 물질적 보상까지 해 가면서 수업을 했다. 그때뿐이었다. 할 수 없이 소리를 지르며 꾸중도 해보았다. 결과는 같았다.
이런 결과가 교원평가로 나타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점수는 참담했다. 진짜 고백하기 부끄러운 점수다. 아무리 억울해도 불신의 연유는 그 절반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이번 평가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교육자로서 소신과 신념을 지키고 있다.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해 주었다. 그들이 건강하고,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꾸중을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평범한 상식이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법보다는 상식과 도덕이 질서를 형성하고 우리를 평온하게 한다. 마찬가지다. 교원능력평가가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고 해도 정상적인 교사를 최악의 선생으로 만든다면 문제가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익명성이라는 공간을 이용해 폄하의 글을 남겼다. 사실을 왜곡하고 인신공격적인 글도 남겼다. 이런 글은 평가가 아니라 차라리 욕이라고 봐야 한다. 이 글은 아이들이나 선생인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선량한 아이들이 1년 동안 수업을 함께 한 선생을 부정하는 패륜아로 둔갑한다면 그 평가 제도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월은 망각의 약이라고 하기도 한다. 망년회라는 말도 있다. 지금 아픔도 살다보면 세월 따라 저만치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이런 짓을 매년 반복해야 하는지는 묻고 싶다. 점수로 나를 들여다보고 반성하는 것은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선생님의 꾸중을 반성의 계기로 듣지 못하고, 분노와 저항의 글로 남기는 성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