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일에 묻혀 살았다. 새 학기 시작부터, 겨울방학 때도 쉬지 못했다. 컨설팅을 하러 다니고, 강의도 제법 했다. 여름방학은 교과서 검토 작업을 하느냐 거의 한 달을 파묻혀 지냈다. 교육과학기술부 홍보 동영상 시나리오를 직접 작성하고 영상을 만드는데 의견 나누기까지 서너 개월을 투자했다.
일을 하면서 힘들다는 느낌이 든다. 과외 시간을 확보해서 하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야간에 혹은 휴일에 일을 한다. 체력적으로 힘들고, 내 시간이 없으니 그만 두고 싶을 때도 많다. 최근에는 몸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일을 만나면 머뭇거리고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막상 발을 빼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은 몸을 움직이든 정신을 동원하든 그 뿌리는 역시 노동이다. 내가 하는 일도 육체노동의 성격이 짙다. 한 시간 강의를 위해서 며칠을 준비한다. 컨설팅을 위해 먼 곳까지 찾아간다. 교과서 교열 작업도 보안을 위해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밥 먹고 일만 했다. 글짓기 심사, 임용고사 면접 등은 작업의 강도도 세지만, 정확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늘 긴장이 된다.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쏟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야말로 정신노동 같지만, 나는 몸으로 글을 쓴다. 개펄에서 바지락을 찾듯, 언어의 개펄에서 격하게 몸을 끌고 다닌다.
그런데도 일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인 즐거움 때문이다. 일이 없다면 홀로 있어 쓸쓸함과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반면 일을 하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온전한 생활의 리듬을 탄다고 할까. 일을 하고 있으면 성실함이 싹트고, 마침내 풍요로움이 열린다.
사람은 세월에 따라 변한다. 그 모습이 갈수록 아름답고 거룩하기도 하지만 추하고 속되게 변화하기도 한다. 일은 삶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문단의 말석에 앉아서 글줄이나 쓴다고 있으니 최소한 추하고 속되게 변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책을 낼 때마다 게으르지 않다는 증거물로 삼고 싶다고 한 것처럼, 부지런히 살아왔다는 말을 할 수는 있다.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창조적인 자아를 발전시키려는 역동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단순히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외부의 환경과 역학 관계를 조절하면서 성장의 욕구를 채워간다. 내가 가끔 과분하게도 평가위원 등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이도 결국은 일이라는 현실과 긴밀한 소통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온 모습이다. 내 인생에 미안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결과다.
정호승 시인의 ‘내 등의 짐’이란 시를 읽었다. 내용은 이렇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대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생각이 스쳤다. 여기서 ‘짐’이라는 단어를 ‘일’로 바꿔도 시의 내용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맞다. 일은 세상을 바로 살게 해 주는 것이고, 귀한 선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겠다고 작정을 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편안한 안주보다 일을 통해 구체적 세계와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다보니 존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과 소통하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신의 발전된 모습이 만들어진다. 그러고 보면 일은 우리에게 역사적 발전 과정을 경험하는 기회를 주는 매개체다.
옛말에 사람이 너무 한가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념이 생겨 방탕과 사치에 흐른다고 했다. 또한 너무 바빠도 자기의 마음마저 돌보지 못하여 마음의 본성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일하는 동안 바빠서 나를 잊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바쁘지 않다. 나에게 글을 쓰는 것은 지독한 노동이면서 동시에 휴식이다. 글의 감옥에 갇혀 생각을 다듬고 여유를 즐긴다. 글을 쓰면서 밝고 맑은 마음을 본다. 명리나 정욕에 현혹되지 않고, 고요한 본성을 여행한다.
산업사회 이후 우리는 이항 대립의 판별이 지성의 힘이라고 믿었다. 인간과 기계, 자연과 과학, 최근에는 다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분할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경계만 깊게 하고 그 어떤 타자와도 융합하지 못하게 했다. 이제 다시 통섭의 키워드가 새로운 담론으로 부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일이 어디 있고, 휴식이 어디 있는가. 양쪽의 조화와 공생이 삶의 에너지로 형성된다. 나는 오직 일과 휴식을 가로질러 그 사이를 오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