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바람을 만나다

2014.01.02 13:47:00

육지로부터 멀리 있는 섬 제주. 외롭게 있는 섬 제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그 제주가 없었다면 비행기를 타는 호사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 여행하는 즐거움도 없다. 아마 제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허전했을 것이다.

제주는 멀리 있다는 느낌이다. 육지는 계획 없이도 훌쩍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제주 여행은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주 가본 기억이 없다. 신혼여행 때, 직원 연수 때 잘해야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마음은 늘 가고 싶지만, 막상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제 제주는 특별자치도라고 해서 행정적으로도 멀리 있나보다.

제주를 찾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자연이 빚어놓은 모습이 보기 드문 경관을 만든다. 제주는 어디서나 바다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고요하게 웃는다. 그리고 기생 화산이 터질 때 형성된 능선이 보인다. 완만하게 흘러내린 곡선이 넓게 퍼져 있다. 선은 마치 왕릉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선과 여유로움이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

흔히 제주는 여자, 돌, 바람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먼 바다를 넘어서 온다. 하지만 바람은 머물지 못하고 곧 떠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아쉬움도 남기지 못하고 다시 바다 쪽으로 빠르게 여행을 한다.

이 바람은 제주 사람들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려 모두 낮은 자세로 엎디어 산다. 집은 작은 규모로 짓고, 지붕을 낮게 했다. 바람을 늦추기 위해 주변에 돌담을 쌓았다. 돌담은 얼기설기 쌓았다. 이는 바람을 막은 것이 아니라 품어내서 순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순응하며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구들이 평화롭다. 자연도 모두 바람 따라 산다. 키 큰 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기우뚱거리는 모습이다. 어느 나무는 모진 바람에 굴곡져 있어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오름에는 아예 나무 하나 키우지 못하도록 거세게 분다. 바람이 신령스러운 쉼터로 만들기 위해 나무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나보다

제주의 바람이 제주 사람들을 수없이 흔들었던 것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도 제주 사람들을 할퀴고 지났다. 천주교도와 관리 사이의 충돌 사건했던 이재수의 난도 가슴 아프게 전한다. 당시 탐관오리와 그들의 지원을 입은 천주교도들의 탄압이 제주 사람들을 궁지로 몰았다. 무고한 양민의 집단 학살을 가져온 4․3사건도 제주의 풍경 속에 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모두 뭍에서 몰려가서 여린 제주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 느낌이다. 후세 사람들이 영화로 소설로 그들의 삶을 위로했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에리다. 하지만 그들은 원한을 품지 않았다. 바람이 나쁜 기운을 휩쓸고 가듯 그들은 역사의 거친 바람을 흩날려 보내고 묵묵히 섬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제주는 뭍에서 보던 풍경과 좀 다르다. 서글픈 이야기가 담겨 있어 쓸쓸하다. 곳곳에 보이는 오름의 황폐한 모습도 제주 사람들의 가슴만큼이나 휑하다. 나무 한 그루 허락하지 않은 자존심이 애처롭다. 그러면서도 바람에 씻겨 맑고 깨끗하다. 하늘빛 바닷빛을 머금고 있다. 풍경들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수많은 사연들만큼이나 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여행 중에 섬을 지키고 사는 사람을 만났다. 민속학자 진성기 씨다. 국내 1호 사립박물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스물여덟에 개관한 이후 고난과 시련의 길을 왔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염원의 고통이다. 용암이 만든 척박한 땅에서 험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지키기 위한 신념이다. 제주 고유 풍습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삶이 경이롭다. 문명이 미치지 않은 모습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제주는 아픈 과거가 오히려 지금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이 그렇다. 추사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고도의 섬 제주로 왔다. 이제 정치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여기서 학문의 경지를 새로 세웠다. 추사 예술혼의 정수인 세한도와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는 세상의 모진 칼바람에 맞서는 과정에서 세한도를 완성했다. 유배지에서 느낀 고독감을 황량하고 메마르게 표현하면서도 제자 이상적의 따뜻한 인품을 담았다. 추사체 역시 마음속 독풍을 다스리고 도달한 경지다.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붓 1000개를 닳게 한 수련의 삶이 만든 것이다. 탄압과 맞서 싸운 질긴 삶의 여정만이 이룩할 수 있는 단계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듯, 세상살이란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자신을 짓누르는 불운과 기구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길에 깊은 울림을 준다. 사람은 누구나 큰일을 만난다.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러주는 것은 아닐까.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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