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국문 어필을 보며

2014.03.24 17:24:00

내 고향 이야기라서 그럴까? 신문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정조(1752~1800)의 국문 어필집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다. 경매에는 관심이 없고 물건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특히 정조의 어렸을 때 글씨와 내용이 궁금한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정조가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를 묶은 어필첩이라고 한다.  경매에 나오는 정조 국문 어필첩은 정조가 만 3~4세경부터 46세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 여흥민씨(驪興閔氏·큰외숙부 홍낙인의 처)에게 보낸 편지 16점을 모아 만든 어필첩이다. 예필(睿筆·세자나 세손 시절 쓴 글씨) 2점, 예찰(睿札·세자나 세손 시절 쓴 편지) 7점, 어찰(御札·왕 즉위 후 쓴 편지) 7점으로 구성돼 있다.


‘오래 편지 못하여 섭섭하더니 엊그제 편지 보고 든든 반갑습니다. 원손.’ 정조가 5~6세 무렵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표현이 꽤 성숙하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조의 한글 편지가 많지 않은 데다, 7세 이전 아주 어린 나이에 쓴 한글 편지가 들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1970년대 우리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봉서'는 지금의 '편지'다. 모음 '아래아'가 보이고 겸양보조어간도 보인다. 편지에서 경제성의 원칙도 적용되었다. 즉 같은 글자를 두 번 반복하지 않고 '∼'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올바르고 좋은 글은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어필첩을 통해 40여년에 걸친 정조의 한글 필체 변화를 비교해 볼 수 있다고. '질(姪)' '원손(元孫)'이라고 서명돼 있어 1759년(7세) 세손(世孫) 책봉 이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편지를 보면 글씨가 어린이답게 삐뚤빼뚤하다. 그런 글씨가 당연히 정상이다.

그러나 내용은? 어린이답지 않다. 글의 내용이 조숙하다. '문안 알외옵고 몸과 마음 무사하신 문안 알고져 하오며 이 버선은 나한테는 작으니 수대(외사촌으로 추정) 신기옵소서. 조카.' 5~6세 무렵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에는 자기 버선이 작으니 외사촌에게 주라는 얘기가 들어 있다. 입던 의류 물려주고 물려벋던 그 당시 왕실 풍습을 알 수 있다.

왕실 풍습만이 아닐 것이다. 일반 서민들은 버선 뿐 아니라 모든 생활용품을 물려 받았다.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옷을 살 때 아이 몸에 맞는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두 치수 큰 것을 샀다. 커서 입고, 딱 맞아서 입고, 작아서 한 번 더 입고. 그 다음엔 동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어머니 세대의 절약정신이 돋보인다.

이 분야 전문 학자들은 "어린아이 글씨라 졸필이지만 그 또래치고는 필체와 문장 구사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평가했다. 예부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있었다. 신체, 말하기, 문장, 판단력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라 손글씨를 보기 어렵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도 컴퓨터 자판 글씨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손으로 쓴 글씨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씨도 그렇지만 한 편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 세계를 알 수 있다.

정조의 국문 어필을 보며 생각해 본다. 우리들 자녀들 키울 때 연필잡기, 올바른 글쓰기를 지도한 적이 있는지 반성해 본다. 식사 할 때 수저 잡기도 마찬가지다. 자녀 교육, 바쁘다는 핑계로 방임해서는 안 된다. 자녀의 글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모가 올바른 글쓰기를 배우고 익혀 자녀의 본보기가 되면 더 말할 수 없이 좋으련만.
이영관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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