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권,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2014.10.13 09:41:00

어렸을 때, 1백만 원은 무척 큰돈이었다. ‘100만 원’은 미처 가질 수 없는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는 돈이었다. 그 당시 고액권도 흔하지 않았을 뿐더러 뉴스에서 나오는 돈에 관한 천문학적인 숫자는 우리의 생활과 별반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당신 지갑엔 ‘사임당’ 몇 분이나 계십니까?” 신문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 내 지갑 속을 살펴보았다. 5만 원권은 단 1장이고 나머지는 1만원 권이다. 세상의 흐름과 등지고 살고 있단 말인가? 세상 흐름에 앞서 간다면 가벼운 5만 원권으로 지갑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한국조폐공사 통계에 의하면 2009년 5만 원권이 처음 4억4400만장 발행된 이래 지금까지 시중에 풀린 5만 원권은 총 8억8953만 장으로 금액으로는 44조4767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발행된 5만 원권 지폐를 가로로 늘어놓을 경우 지구를 3.42바퀴 두를 수 있는 양이다.


통계 그래프를 보니 2011년부터 해마다 5만 원권 지폐제조량이 1만 원권보다 앞섰다. 2013년의 경우, 5만원 권은 1억5000만장, 1만원권은 1억1000만장 발행되었다. 특이한 사실은 5천원 권이나 1만원 권 회수율은 70%를 넘는데 5만 원권은 26.3%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은행에서 나간 5만 원권 10장 중 7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많이 발행된 5만 원권 어디로 갔을까?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검은 돈 지하경제다. 2011년 발생한 희대의 ‘마늘밭 돈다발’ 사건은 지금도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전북 김제시 한 마늘밭에서 5만 원권 22만 장이 비닐에 싸인 채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돈은 인터넷 도박으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이었다.

5만 원권이 나오면서 고액을 숨기는 게 매우 쉬워졌다. 일반적인 ‘007 가방’에는 1만 원권 1억 원이 들어가지만 5만 원권으로는 5억 원이 담긴다. 사과상자에는 25억 원까지도 들어간다. 지난해 원전 비리를 저지른 한국수력원자력 간부 집에서는 5만 원권 돈뭉치 6억 원이 나왔다. 전형적인 검은돈이다. 일반 국민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고액권이 부정과 부패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5만 원권 발행이 우리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경조사비 상향조정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경조사비는 5만957원. 2008년 4만4103원에서 5만 원권이 발행된 2009년에 4만9653원으로 12.6% 상승했고 2010년에 5만2131원으로 집계돼 심리적 마지노선인 ‘5만 원’ 벽을 뚫었다.

2006∼2008년 경조사비 상승률이 4.3%에 그친 점을 고려하면 5만 원권 발행 이후 경조사비 지출이 급격히 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액권 발행이 경조사비 상향을 자연스럽게 초래한 것이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지난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122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통계는 응답자의 70%가 결혼식 축의금으로 5만 원을 낸다고 밝혔다.

일반 서민들은 수입은 별로 늘어나지 않는데 반해 지출이 늘어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것이다. 설날 자식들이나 조카들에게 주는 용돈도 5만 원권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1만 원권은 쩨쩨(?)해서 내놓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 수당으로 편지봉투 속에 15만 원을 받았다. 1만 원권이라면 두툼하였겠지만 5만 원권 3장이니 가볍기만 하다. 15만이라는 돈이 하찮게 보인다. 요즘 억 단위가 보통인 세상에 매달 받는 월급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간이 부은 것인지 이게 정상인지 모르겠다.

5만 원권 발행, 생활의 편리는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돈에 대한 가치를 가볍게 하였다. 어렸을 적 큰 돈의 상징인 ‘1백만원’ 도 5만 원권이면 20장이다. 무게도 가볍다. 온라인 쇼핑몰과 서울시내 주요 백화점에서 개인 금고가 인기 아이템이라는 소식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영관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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