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제자로 둔 스승 윤선도

2015.07.08 16:54:00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 몸이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임금과 스승도 아버지처럼 똑같이 존경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승은 가르침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니, 공경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죽 했으면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을까. 시조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와 조선 17대 효종 임금의 이야기도 이에 버금간다. 둘은 신하와 왕이지만 스승과 제자로도 가슴에 깊게 담기는 추억이 있다.

고산은 42세가 되어 출사의 꿈이 비로소 실현된다. 1628년 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5년 동안 요직을 거치면서 사부를 겸임했다. 사부는 어린 왕자의 스승이다. 왕자는 왕의 아들이다. 그런 사람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백성을 품어야 하는 교양을 가르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학문에 능통해야 하고, 인품이 뛰어나야 한다. 학문은 책을 통해 가르치지만, 어린 왕자에게 책으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세상을 보는 눈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봉림대군은 12세부터 17세까지 고산으로부터 배웠다. 대군은 학문을 하기 전에 스승에게 절을 하고, 공부를 할 때는 책상 아래서 책을 봤다. 왕자라고 해도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은 극진했을 것이다. 고산도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 인조는 군왕으로 정국 운영에 바빴다. 당연히 어린 왕자는 아버지의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지낸다. 또래 친구도 없고, 궁중의 법도에 얽매여 운신의 폭도 좁다. 사부 윤선도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친구가 없는 왕자에게 벗이 되기도 했다. 법도도 가르쳐야 하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궁궐 밖의 세상을 이야기 해 주기도 했다. 대군은 이런 스승의 사랑을 가슴에 오래 품고 있었다.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자로 책봉됐다. 왕(효종)에 즉위하자 뜻을 같이 하는 신하를 찾았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계획을 수립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하지만 북벌정책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백성의 생활고를 거론하며 군비 확장을 반대했다.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효종은 왕이 되고도 마음속에 늘 스승인 윤선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등극하고 두 해가 지나 남녘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를 불렀다. 66세의 윤선도에게 벼슬을 내렸다. 병으로 취임하지 않았으나, 왕은 다시 불렀다. 할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으나 이번에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효종은 윤선도를 특명을 내려 불렀다. 이때 반대파는 효종이 계속 윤선도를 특명으로 임명하는 것에 불만이었다. 결국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하다가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했다.

송시열은 아버지(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서인의 거두였다. 효종은 북벌 정책에서도 송시열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송시열과 대립을 하고 있는 윤선도를 배려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효종은 굴복하지 않았다. 효종은 사부인 고산께서 멀리 해남에 가게 되면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고 왕의 과실을 충고 보좌하기 어렵다 하여 한양에서 가까운 화성(수원)에 집을 지어 주고 살도록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효종이 승하하셨으니, 죽기 전에 사부에게 마지막 선물을 내리고 가신 것이다.

효종의 승하 이후에도 고산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송시열과 대립하고 유배를 간 후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다. 그러다가 82세에 고향 해남으로 정착했다. 문제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집이었다. 임금님이 지어준 집을 남에게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방치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해남 녹우당으로 옮기기로 했다. 당시 운송 수단이 발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집을 뜯어 멀리 옮겼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임금님이 주신 집은 가문의 명예이다. 이러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녹우당은 고산의 4대 조부인 어초은 윤효정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덕음산을 주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자연 경관 또한 으뜸이다. 집터를 둘러싼 터가 50만평 정도 되고, 집도 1만여 평이나 된다.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르지만, 녹우당은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이 사랑채가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와 만든 것이다. 녹우당이란 이름은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친구였던 옥동 이서가 써 준 것이다. 집 뒤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아’하는 소리가 비가 내리는 듯하여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유명한 서예가이며 빼어난 음악가이기도 했던 옥동 이서는 녹우(綠雨)가 옛 선비들의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한 것처럼, 해남 윤씨와 공재의 철학 및 학문적 사고에 견주어 당호를 정한 것이라고 한다.

녹우당에 전하는 ‘은사첩’(보물 482-4호)도 고산과 효종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문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신하와 백성들에 대해 여러 가지 예(禮)를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은사를 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은사첩’에는 윤선도에게 여러 차례 내려진 은사 물품과 은사문이 있다. 여기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미(米)·포(布)·잡물(雜物) 등부터 벼루, 먹, 붓, 삭지 등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부에 대한 왕실의 예우가 어떠했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윤선도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5년 동안 겸임했다. 스승 윤선도와 제자 봉림대군은 그렇게 만났다. 왕실이라는 특수적 공간이지만 스승과 제자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서로가 진보해 나가는 관계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효종은 윤선도가 신하이지만 아버지처럼 공경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처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스승은 당파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왕도 조정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도 왕은 스승을 찾고 받들어 모시는데 노력했다. 세태가 모두 비켜가도 제자는 스승을 위한 마음에 변함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꽃피우는 매화향기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오늘날 스승을 대하는 문화가 예전 같지 않은데 마음에 새겨볼 만한 이야기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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