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미야,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는지

2016.09.12 12:44:00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핏덩이로 태어난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여러가지의 영향을 받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 과정이 바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선생님이 태어나 어릴 때는 유치원이 없어서 그냥 자유롭게 자연 속에서 살았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어릴 때 기억은 가물가물하단다.
 
이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의 생각에 큰 변화를 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도 매우 중요하였단다. 그래서 '초등학교의 추억'을 이렇게 적었단다. 너도 시험공부로 바쁠지 모르겠지만 시간을 만들어 너의 초등학교 시절을 잘 정리하여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이렇게 보낸다. 이 글을 읽어보면 너의 초등학교 시절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은 무엇인가? 등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져보고 이에 대하여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 기록을 다시 보면서 수준을 높여가는 노력이 바로 너를 잘 성장시킬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글을 본보기로 보낸다. 너도 너의 초등과정을 생각하면서 정리하여 나에게 보내준다면 너와 소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세 살 위인 형이 초등학교에 다닌 덕분에 형이 2학년에 올라가자 바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형이 책을 보니 등 너머로 한글을 깨우친 것을 본 부모님이 빨리 학교에 보내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 마을은 부산면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부산동초등학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하루 왕복 10킬로미터는 걸어야 했다. 그리고 비가 올 때는 길이 막혀 산길을 따라 가야하기에 더욱 힘들었다. 때로는 다니는 길목에는 산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물이 위험하여 집단 등교를 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친구들보다 빨리 학교를 다니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겨울철이 되면 해뜨기가 바쁘게 일어나 밥이 뜨거우니 찬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경우도 많았다. 내 동갑 친구들은 나보다 한 학년 낮거나 두 학년 아래였다. 사실 나는 친구 누나들과 같은 학년이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따라가는 것도 꽤나 힘들었던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하여 보니 6.25가 끝난 뒤라 책걸상도 없는 마루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는 형편이 어려웠던 터이라 미국에서 보내온 굳어버린 우유와 옥수수 가루를 가끔 배급을 주었다. 가끔 집에 오는 길에 허기진 배를 채운 때도 있었고 밀이나 보리를 불에 구워 먹기도 하였다.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목에는 논이 있어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논에서 일을 하시다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자기를 풀고 오늘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곤 하셨다. 비록 아버지 자신이 배우지 못하여 농사일을 하셨지만 아들의 공부에는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농사일을 돕는 일도 일상이 되어 갔다. 특히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 경우가 있어도 동생들이 많기 때문에 동생들을 항상 돌봐야 하는 일은 우리 형제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이렇게 자라서인지 형제간의 우애는 깊어졌으며, 형제가 많아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보통으로 준비하여서는 만족스럽게 배를 채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상급학년이 되면서 잊혀 지지 않은 추억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프기 일상이었다. 그럴 때에는 간식으로 남의 밭에 들어가 가지나 오이 등을 따서 먹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비가 많이 오는데도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더욱이 큰 비가 내리면 학교 수업을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스스로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불평 없이 자신의 삶을 키워온 것이다.
또, 우리는 항상 용반리를 거쳐 학교를 가야하기 때문에 때로는 강둑에서 달리기 대회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먼 길을 열심히 다닌 덕분에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6학년이 되면 그 당시 중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는데 시골 초등학교에서 장흥중학교에 합격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때로는 야간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한 번은 늦은 시간이 되어 남의 밭에 심어 놓은 감자를 캐다가 주인에게 들켜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두가 책가방을 등 뒤에 단단히 묶고 도망쳤다. 그런데 용반보를 건널 때 친구 황순이가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졌다. 다리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 헌 옷을 찢어 싸맨 후 도망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때로는 등굣길에서 조그만 다툼으로 싸우기도 한 일, 또 한 번은 선배 형이 학교에 가기 싫으니 산기슭에서 놀고 학교에 가지 말자고 꼬드기는 바람에 학교를 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산에서 놀면서 맹감 등 열매 같은 것을 따먹다가 하교할 시간이 되면 집에 가는 일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시를 앞두고 준비 없이 진학을 할 수는 없었다. 6학년이 된 남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6학년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1년간 쉬는 시간을 가졌다. 1년이 지난 후 이제 원래 동갑이던 친구들과 같은 학년이 되고 보니 학습한 내용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성숙도 충분히 되지 않았는데 나보다 한 살 위인 형들과 다닌 5년 동안이 상당히 힘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시험을 3개월 가량 앞두고는 학교 옆 아저씨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최임규 담임 선생님의 좋은 지도를 받았다. 그 결과 중학교는 무사히 합격하게 되었으나 같이 공부한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우리학교에서 7명 정도 밖에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시골학교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돌아보게 한다. 이에 떨어진 친구들은 결국 다른 지역의 중학교에 입학을 한 후 2학기에 장흥중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워낙 국가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라 나보다 더 공부를 잘한 친구들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지금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김광섭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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