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 '모던 타임스'를 보면 찰리 채플린의 표정과 손동작만 봐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말소리가 전혀 없는 작품인데도 요즘 영화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것은 채플린이 표정과 손동작 같은 제스처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70%는 제스처
제스처는 세계 공용어다. 채플린 영화는 번역 없이 세계 어디서나 인기를 끈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우리는 채플린처럼 할 수 있다. 대개 세계 어디서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긍정의 표시이고, 좌우로 흔드는 것은 부정의 뜻이다. 또 이빨을 드러내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적대적 공격 의사다. 악수는 우정과 협조를 상징한다. 말과 글이 있으니 제스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구에 따르면 지금도 동일 언어의 문화권에서는 의사소통 중 30%만 말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70%는 비언어적 행동, 즉 제스처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간의 말도 수화와 같은 제스처로부터 진화했다는 이론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손동작이 말할 때 단어를 빨리 떠올리게 도와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 쓰는 뇌의 영역이 보통 사람이 말을 할 때 쓰는 영역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이 이론의 지지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는 매우 다양한 수화를 구사할 줄 안다. 미국 네바다 대학 연구팀은 1970년대에 침팬지 '와쇼'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와쇼는 한 연구원과 132단어의 수화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짖는 소리만 듣고도 개를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수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와쇼는 사람이 간섭하지 않아도 새끼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손의 진화로 음성 언어 탄생
과학자들은 인류가 직립을 하게 되면서 손이 자유로워져 제스처 언어를 많이 쓰게 됐고, 이런 의사소통 기술의 발전이 뇌를 발달시키면서 결국 고급 음성 언어가 탄생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의대 신경학자 프랭크 윌슨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윌슨 박사는 〈더 핸드 : 손의 사용이 어떻게 뇌, 언어, 인간 문화를 만들었나〉에서 "손의 진화가 뇌 용량을 급속히 팽창시켰고 이 과정에서 언어를 처리하는 부분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손짓과 미분화된 말로 의사소통을 하다가 발성 기관이 진화하면서 말이 언어 행위를 도맡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고급 음성 언어가 생기는 데에는 발성 기관의 획기적인 발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촘스키나 그의 후계자인 매사추세츠 공대의 스티븐 핑커는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언어를 탄생시켰다고 보고 있다. 성대가 갑자기 돌연변이에 의해 변화하더라도 이것을 구동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현생인류는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제스처를 통해 뇌의 언어중추를 발달시켰고 이어 목이 길어지고 고성능 성대를 갖게 되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한 언어 치료사는 아기가 멍청한 것 같지만 6개월 정도면 마치 농아처럼 사인 언어나 제스처를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아기는 더 줘, 먹을래, 밀크, 아파, 졸려, 도와줘 등 50개의 사인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아기에게도 제스처는 뇌의 언어중추를 단련하는 걸음마인 셈이다.
수화도 언어중추가 담당해
연설을 하면서 이 가운데 적절한 단어를 골라 문법에 맞춰 말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만 놀리며 말하는 것보다 손동작을 하면서 말을 하면 놀랍게도 단어를 빨리 찾게 된다. 이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손으로 표현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단어 찾기 퀴즈를 해보면 손으로 막대를 잡은 사람은 손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에게 질 확률이 높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늘 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연설을 했다. 그는 훌륭한 연설 솜씨로 대통령이 됐지만 만일 그의 손을 꽁꽁 묶어 놓고 연설을 시키면 말을 더듬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왼손을 쓴다고 해서 강제로 오른손을 쓰게 하면 말을 더듬는 것도 손동작과 언어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수화는 왼 뇌에 의존하는 말과 달리 시각·공간적 언어여서 오른 뇌가 담당할 것이라고 추측해 왔다. 음성 언어는 음의 청각적 시간적 변화에 의해 기호화되지만, 수화는 손이나 몸짓의 신호에 따른 시각적 공간적 변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화도 말처럼 언어중추가 담당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캐나다 맥길 대학 심리학과 로라 안 패티토 교수팀은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도 정상인이 말을 주고받을 때처럼 언어중추가 활동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2000년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와 정상인이 언어활동을 할 때 뇌 속의 피의 흐름을 양전자방출단층촬영법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청각 장애인과 정상인 모두 왼 뇌의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의 혈액의 흐름이 왕성했다.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은 사람의 뇌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중추이다.
뇌의 언어중추가 말하고 듣기뿐만 아니라 제스처도 관장한다는 것은 제스처와 언어의 뿌리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말해 준다. 브로카 영역은 말을 할 때 문법에 맞게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 처리의 핵심 장소이고 베르니케 영역은 귀로 들은 말을 이해하는 일을 한다. 뇌의 언어중추인 이 두 영역은 19세기부터 뇌가 손상돼 실어증에 걸린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의사들이 발견한 곳이다.〈끝〉
이번 호를 끝으로 '과학교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