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에서 경험은 중요하다. 인생 사이클에서 경험을 잘 디자인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만으로 삶의 전부를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길을 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1979년 10월 26일, 나는 광주 제2수원지에서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훈련을 마치고 나오면서 흑백 TV에선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정부 발표를 들었다. 대통령 유고는 온 나라 모든 기관의 정상적 흐름을 중단시켰다. 두터운 먹구름이 잔뜩 낀 불확실한 미래가 이어졌다. 10개월 만에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더니 국군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 젊은 기억 속의 대통령 유고는 일상을 바꾸고 역사를 뒤틀었다. 이후 1980년 5.18이 일어나던 해 경험한 시민들의 위대한 힘은 역사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였다.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여름에는 최루탄 냄새가 범벅이 된 전남대학서 자격연수를 받았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나는 지금 그때와 비슷한 심리적 충격이 몰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국가 리더십이 상처를 입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살아 있는 유고’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내리는 여러 정치적·정책적 결정들이 과연 그의 인격이 실린 선택인지 의심하고 있다. 한 여인의 국정농단에 대한 전대미문의 사태에 어떻게 그렇게 어정쩡한 사과, 그렇게 미적미적한 조치가 나오다니 국민들은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아 불안이 증폭된다. 지도자가 분열적 성격, 정신적 불구라는 의심을 사면 리더십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처 많은 박 대통령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통치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국정운영 체제를 망가뜨린 행위를 국민들은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안보·경제 비상사태에 정치적 적대와 무능, 사회적 분열과 분노, 정글 같은 이기심이 판치고 있다. 애국심이나 공동체를 경멸하는 냉소주의도 휘발유처럼 깔렸다. 대통령의 말이 돈 많고 치맛바람 센 부자 엄마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니 불씨 하나가 회오리처럼 나라 전체를 태워버릴 기세다. 시중에 퍼져가는 탄핵·하야론은 삐끗 한 뼘만 어긋나도 큰불을 낼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벌써 대학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27일 부산에선 박 대통령이 참석한 박람회 행사장에 대학생들이 ‘대통령 하야’ 플래카드를 들고 기습시위를 벌였다. 박 대통령 면전에서 ‘하야’ 구호가 나온 건 처음이다. 교수들도 가세했다. 성균관대 교수 32명, 경북대 교수 50명은 27일 시국선언문을 내고 중립내각 구성과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다. 29일 서울 청계광장는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벌여온 국기 문란에 대한 성토를 하는 시민들이 촛불 시위를 시작했다.
정부가 해결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된다. 볼셰비키 혁명을 불러들인 러시아 제정 말기에 라스푸틴이란 괴승이 국정을 흔들어 나라를 말아먹은 역사를 남의 나라의 만화 같은 얘기로만 들었는데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박 대통령은 이런 성난 민심을 직시해야 한다. 왜 학업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고 지성의 상징인 교수들이 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시국선언을 재개했겠는가. ‘최순실’ 때문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국민을 무시하고 정상적인 국정운영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비민주적 행태, 오만·불통·일방주의에 참다 못해 폭발한 분노의 결과가 아닌가?
무려 200여 년간 대통령제의 정교한 절차와 제도를 숙성시켜 온 미국에서조차, 선출된 제왕으로서의 대통령의 성패는 결국 어떠한 제도적 장치보다도 품성이 좌우한다는 것을 오바마 임기 8년이 입증하고 있다. 흑백 혼혈이라는 소수자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편모·조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갖은 심리적 콤플렉스를 가질 법한 오바마 대통령은 그 시련을 넘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건전하고, 균형감 있는 품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탁월한 품성이 임기 말까지 오바마 대통령을 성공적으로 이끈 비결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의 뛰어난 균형감과 더불어 자신의 역할, 역사적 위치를 상대화하는 능력이며, 둘째는 개인적 친분 관계라는 편안함의 유혹을 떨치고 후보 시절부터 모든 의사 결정을 공개적이고 투명한 절차에 따랐다는 점을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파르고 험악한 하산 길을 내려오게 될 박근혜 정부의 위기 수습 과정을 지켜보며 우울과 분노·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좌절과 분노가 우리 공동체를 더 피폐하게 만들기보다는 우리 정치를 바꾸어 나가는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 이성적 시민의 길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라는 박대통령의 8.15경축사를 상당수 국민들은 기억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정농단’의 진상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백하고 인적 쇄신으로 비서진을 통째로 물갈이해도 몰아치는 폭풍이 가라앉을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대통령 주변에서 성을 쌓고 함게 동거한 사람들과의 소통도 심각한 문제해결의 방아쇠가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