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겨울밤

2022.01.22 14:20:36

 

겨울밤 긴 침묵은 세상을 꾹꾹 눌러 스물네 시간의 빛을 짜낸다. 어둠은 새로운 눈과 귀를 주며 슬픔을 기쁨으로 보라고 절망을 희망의 노래로 들으라 하며 먼지 쌓인 추억을 들추어낸다.

 

섣달은 음력 12월로 설이 드는 달이라는 뜻으로 ‘설달’이라고 불렸다. 한 해를 열두 달로 잡은 것은 수천 년 전부터지만 어느 달을 한 해의 첫 달로 잡았는가 하는 것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중에는 동짓달인 음력 11월을 첫 달로 잡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음력 12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잡고 음력 12월 1일을 설로 쇠었다. 후에 음력 1월 1일을 설로 잡았지만 음력 12월을 ‘섣달’로 부르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설달’이 ‘섣달’로 불리는 것은 ‘ㄷ’과 ‘ㄹ’의 호전 현상에 의해서이다.

 

일 년 열두 달 중 제일 춥고 밤이 긴 달이 동지섣달이다. 동짓달 겨울밤은 도란도란 이야기가 밤하늘 별처럼 수를 놓고, 섣달 겨울밤은 설을 준비하는 설렘과 기다림으로 손가락을 꼽으며 보내는 달이다.

 

설을 앞두고 텅 빈 촌집을 찾았다. 인적이 끊긴 흙 마당은 가랑잎을 덮어쓴 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여 푸석거리고 문풍지가 떨어진 격자무늬 방문 창호지는 누렇게 바랜 지 오래되었다. 저 안방에서 농사일 날품팔이에 고단한 몸을 뉘신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와 오 촉짜리 전구 아래 알아듣지 못할 흥얼거림으로 길쌈을 하던 어머니와 긴 겨울밤을 보냈었다.

 

유년의 촌집 겨울밤은 무서웠지만 정겹기도 하였다. 남해의 겨울은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분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온화하지만 바람 끝엔 언제나 추위가 몰려온다. 동지를 며칠 지난 밤이다. 집 뒤의 포구나무 숲에선 부엉이가 울고 한 번씩 몰아치는 삭풍은 뒤꼍의 시누대를 사그락거리고 문풍지에 휘파람을 싣는다. 그럴 때마다 오시시 털끝은 일어나고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이런 겨울밤 제일가기 싫은 곳이 변소였다. 참다 참다 안 되면 삐걱거리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검정 고무신을 신는다. 그럴 때면 어둠 속 청마루 밑에서 검은 손이 나와 끌어당길 것 같았고, 마당에 서면 초롱초롱한 별빛과 시퍼렇게 홉뜬 달빛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이런 무서운 밤이 있었는가 하면 구수하고 맛깔스런 겨울밤도 있었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면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나풀거린다. 안방 시렁에는 짚으로 엮은 메주가 달려있고 긴 널빤지를 가로 대어 만든 뒤주에는 고구마가 숨을 쉬고 있다. 메주, 고구마, 아버지의 담배 냄새까지 뒤엉킨 안방은 겨울밤의 대표 냄새였다. 이런 고구마는 긴 겨울밤 별다른 먹거리가 없던 시절 주전부리였다. 가마솥에 밥을 짓고 나면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몇 알 넣어둔다. 어머니의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한 식경 지날 즈음 길고양이처럼 부엌 아궁이를 뒤져 검댕이가 된 고구마를 용케 찾아내어 껍질을 벗기면 노란 김이 모락모락 다디단 살이 가히 천상의 맛으로 감긴다. 여기에 동치미 국물 한 술 더하면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설은 예나 지금이나 대개 양력보다 한 달 가까이 늦게 드는 경우가 많다. 음력 섣달은 동짓달 못지않게 긴 겨울밤이다. 섣달 밤이 동짓달 밤보다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다리는 설이 있고 설을 준비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섣달로 접어들면 집은 설 준비에 땔감 준비로 바빴다. 아버지는 먼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조막손 아이들은 마을 가까운 산에서 솔방울 줍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섣달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때가 되면 소가 있는 집들은 소여물 삶는 냄새로 구수하다. 아이들은 하루종일 썰매 타고 연 날리며 밖으로 나돌았다. 그러니 손발은 새까맣게 때가 앉아 까마귀가 친구 하자고 할 지경이다. 이런 날 저녁이면 군불 솥이나 쇠죽솥에 데운 물에 손발을 담가 때를 불린 후 까칠까칠한 돌멩이로 미는 일도 있었다.

 

설 열흘 전부터 섣달 하루하루는 축제의 시간이었다. 안방 윗목에는 콩나물시루가 자리 잡고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줄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잠결에 아련하다. 어쩌다 그 무섭던 아버지도 마음이 내키면 민화투 놀이도 같이 해 주시곤 하였다.

 

엿기름으로 조청을 고우는 날을 더 신이 났다. 안방 구들목 자리는 종일 지핀 불로 누렇게 변하고 발도 못 디디게 뜨거웠다. 밖에서 놀다가도 엿기름이 조청으로 변할 즈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는다. 기다림 끝에 조청 한 숟갈 얻어먹으면 그 감칠맛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섣달은 춥기도 하였다. 걸레로 마루를 닦고 돌아서면 얼어서 하얗게 되고 걸레는 마른 가오리 짝이 된다. 어머니께서 장만한 설음식은 언제나 안 청에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친다고 먹을 것이 많아 잠들기 전 몇 번이나 들락거려 한기 들어온다고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그리고 섣달 그믐밤은 참 정겨웠다. 집안 곳곳에 불을 켜 놓고 아버지는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가래떡을 써시고 어머니는 조왕신께 촛불을 올리고 행주치마에 한기를 싸고 방으로 들어오신다. 그 모습이 선하다.

 

설이 며칠 남지 않았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함께한 겨울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이런 겨울밤 정한을 MZ세대들은 어디서 경험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이 영글고 아버지의 휴식이 함께한 겨울밤! 소리 없는 별빛이 밤 그늘에 쌓인 푸른 마당을 밟고 오줌 누러 가던 오싹한 겨울밤 그리움에 젖어본다.

 

 

장현재 경남 해양초 교사 qwe85a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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