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역사] 의상, 지친 백성들을 신앙으로 끌어안다

2024.02.19 09:00:04

 

의상은 진평왕 47년(625)에 진골 집안에서 태어나 19세 때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해 불교를 공부하러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부에 열중해 결국 병을 얻었다. 의상은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 잠시 머무르며 치료했다. 유지인에게는 선묘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과 함께 지내면서 의상을 짝사랑했다. 그러나 의상은 그녀를 제자로만 생각했다. 선묘의 정성 어린 간병으로 의상은 완쾌해 다시 길을 떠났다. 선묘가 길을 떠나는 의상에게 귀국할 때 자기 집에 들렀다가 가길 청하니 의상은 쾌히 승낙했다.

 

의상은 지엄대사의 제자가 돼 공부하던 중 당나라가 30만 군사로 신라를 침범한다는 정보를 듣고 조국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무왕 11년(671)에 귀국길에 올랐다.

 

의상은 전에 약속한 대로 귀국길에 선묘의 집에 들렀으나, 때마침 선묘는 외출 중이라 유지인 부부만 만났다. 선묘가 집으로 돌아오니 의상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선묘는 의상이 귀국할 때 들르면 주려고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해 기다리던 중이었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의상이 왔다가 신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는 법의를 가지고 산둥성 해안에 다다랐지만, 의상이 탄 배는 떠나고 흰 돛만 보였다. 선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가 법의를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했다.

 

“진심으로 조사님께 공양하오니 원하건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때마침 바닷바람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 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했다.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

 

선묘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용이 돼 의상의 서해 바닷길을 호위하면서 안전하게 신라로 돌아가게 했다.

 

의상은 문무왕에게 당나라가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대비하게 했다. 문무왕은 고구려, 백제 부흥군과 힘을 합쳐 당나라 군사를 매소성(오늘날 의정부 부근)과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무찌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조화와 위로, 해동 화엄종 창시

 

의상은 우리나라에서 해동 화엄종을 처음 만든 스님이다. 화엄이란 부분과 전체, 개체와 통일이 하나라고 보는 불교이다. 즉, 고구려나 백제의 백성들이 가진 고유성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700년 가까이 분열된 나라에서 각기 살았던 삼국의 백성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조화를 위해 만들어진 종교다. 당시 신라는 30년 동안 백제, 고구려와 전쟁을 했으며,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때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30년간 전쟁으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살고 죽는 일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내 곁에 다가올지 몰라 불안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신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주면서 위로해 주는 종교일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불교 교리가 아닌 현재의 생활에 만족을 주는 신앙, 삶과 죽음을 초월해 위로를 줄 수 있는 신앙, 죽어서 극락세계의 평안함을 줄 수 있는 신앙을 추구하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의상이 창건한 해동 화엄종이다.

 

문무왕은 당나라를 축출한 후에 의상의 사찰 건립을 적극 지원했다. 의상이 신앙을 통해 삼국통일과 당나라 축출 등을 겪은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가 되기 어려운 삼국의 백성들을 안정, 통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왜 부석사(浮石寺)라 했던가?

 

의상은 경북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폈고, 이곳이 사찰을 세우기 좋은 명산임을 알았다. 하지만, 의상이 절을 세우려고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면 다음 날 쓰러져 있었다. 의상의 고심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고 있던 선묘는 도깨비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에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큰 바윗덩어리를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절을 짓는 것을 방해하던 도깨비들이 큰 바윗덩어리에 깔려 죽고 나서 의상은 부석사를 무사히 짓게 되었다. 선묘가 하늘에서 던진 큰 바윗덩어리는 지금도 지면에서 떨어져 있다고 한다. 도깨비들이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절 이름이 ‘부석사(浮石寺)’라 불리게 되었으니, 때는 문무왕 16년(676) 2월이었다.

 

이 건립 설화를 그대로 믿어야 할까? 사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아직도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세력, 백제를 부흥하려는 세력들이 신라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반신라적인 세력들을 제압하거나 그들을 보듬어 포용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부석사의 주불전은 우리에게 익숙한 무량수전이다. 20여 년 전에 최순우 선생이 저술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널리 알려진 전각이다. 건물의 균형과 절제를 주기 위한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요, 봉정사 극락전‧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목조건축물이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공민왕이 썼다.

 

무량수전에는 아미타여래(소조여래좌상)를 주불로 모셨다. 다른 전각과 달리 무량수전에는 아미타여래 한 분만 계신다. 그리고 전각은 남향인데 전각 안에 있는 불상은 왼쪽에 안치돼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서쪽, 즉 서방정토(극락)를 향해 간절함을 드러낸다.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에서 ‘무량수전’의 ‘무한하고 영원한 삶’을 나타낸다.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에게 사후에 극락이라는 큰 위로와 위안을 주기 위한 선물은 아니었을까?

 

부석사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안양루와 조사당의 선비화이다. 범종루와 돌계단을 지나 안양루에 올라서면 무량수전과 석등이 보인다. 안양루의 ‘안양’은 ‘안양정토’의 줄임말로 ‘극락’을 뜻하며, 우리나라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극락세계에 와있는 착각에 빠진다. 의상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극락세계를 미리 알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무량수전에서 봉황산 방향으로 300m 지점에 조사당이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고려 말기의 목조건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곳에 의상이 사용했다는 지팡이 나무가 있는데, 골담초라고도 한다. 의상이 도를 깨쳐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선비화의 자리에 꽂으며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인데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할 때는 잎이 돋고 꽃이 피지만, 일제 시대에는 잎은 돋고 꽃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앞으로는 선비화에 계속 꽃이 피기를 기원해 본다. 선비화의 나뭇잎을 따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의 손을 타서 지금은 철망으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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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보기)

 

문무왕이 의상을 존경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려고 하자, 의상은 불법의 평등을 내세우며 이를 사양했다. 통일 직후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을 크게 지으려 하자, 의상은 화려한 궁궐보다 부처님 말씀의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21년 기사를 보면 ‘비록 허허벌판에 띠집이라 할지라도 정도를 행한다면 복업이 오래갈 것이나, 진실로 그렇지 못한다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 성을 쌓을지라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흔히 의상의 불교를,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귀족불교라고 하는데, 이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의상대사가 만든 해동 화엄종의 성격을 찾는다면? (해설은 다음 회에)

무량수전과 공민왕이 쓴 현판.

민병덕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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