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80년대 초반에 결혼을 하였다. 어느 한 날 교수였던 필자가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갔다. 옆 좌석에 앉은 60대 아주머니가 ‘어디 가우?’ 하고 물었다. ‘출장을 가요’ 하였더니 ‘남편이 벌이가 신통치 않우? 직장을 다니게’ 하였다. 당시의 보편적 인식이다. 임신을 하면 눈치가 보이고, 방학에 맞춤 출산을 하지 못함은 민폐였다.
맞벌이 부모만 힘든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어려움이 많다. 30대 후반인 큰 아이가 ‘예전에 친구에게 크게 잘못한 것이 있어요’하고 말하였다.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아이 친구 엄마는 필자와 남편이 모두 박사이며 지위가 있으므로 좋은 가정이라 생각하고 필자의 아이를 자주 집에 초대하였다. 가정을 따듯하게 지키며 아이들 돌봄에 전념하는 엄마로 좋은 책도 같이 보게 하고, 먹거리도 차려주며 아이들이 서로 잘 지내게 하려 노력하였다. 필자의 아이는 늘 엄마가 곁에서 돌보아주는 친구가 샘이 났는지 친구의 책에 온통 낙서를 하고 더러 찢고는 돌려주지도 않았단다. 생각할수록 너무도 미안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결혼, 아이키우기 모두 처음이니 아이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빚어진 참사이다. 햇살같은 엄마가 늘 곁에서 돌보아주는 친구를 보는 큰 녀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필자의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 동네 주민들은 ‘큰 녀석이 너무 의젓해요. 동생을 정말 잘 챙겨주네요’ 하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 말은 ‘부모가 무심하다’는 의미이다. 큰 녀석은 또 ‘지금도 가슴아픈 일은 동생이 너무 형에 매달려 친구와 노는데 방해가 되어 한사코 떼어놓던 어느 날’ 이란다. 동생이 울고불고 하는데 떼어놓고 친구와 나갔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반 친구들에게 끌려가 화장실에서 매를 맞아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고, 동네 일진에게 목잡혀 끌려다니며 ‘돈’을 빼앗겨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당시 필자는 ‘엄마 지금 일하쟎아’하고 소리지르며 말도 못붙이게 하였다. 남편은 당시 한국 최대프로젝트인 한국형 전투기개발을 위해 팀전원이 연구실과 실험실에 상주하다시피 하였으므로 집에 없었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필자는 일에서 다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명절에 간소하나마 제사상도 차릴 수 있었다. 큰 집에서 제사상을 차리던 것을 어머님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대체하라 하셔서 큰 집 제사가 중단되었다. 남편은 돌아가신 아버님에게 절을 올리고, 술을 올리고 싶어하였다. 약식 제사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불렀다. 남편은 할아버님께 너희들도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기회를 주었다. 아이들은 머뭇거리다가 부모에게 서운했던 일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화장실에서 매를 맞아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말해보았자 돌아보지도 않고 ’그랬어?‘ 하거나 ’엄마 지금 일하쟎아‘ 며 혼만 나니까요’ ‘동네 깡패에게 돈 여러번 빼앗기고, 반 친구들 가방 들어주고, 식사 시간에 친구들이 내 젓가락 던져버려도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결혼하면 맞벌이는 안할거예요’ 부모를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며 말을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다.
필자도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도 강의하며 박사 공부하느라 서울로 오르락거릴 때 터미널에서 쓰러졌으면 아마 힘들었을거야’ ‘전철에서 소매치기를 세 번이나 당했어. 가방이 칼에 그어져 나갔는데도 몰랐지. 학교앞 빵집에서 빵하나 사들고 종종거리며 다녔는데 빵집에서 값을 지불하려는데 지갑이 없었어. 주인분이 빵을 그냥주셨지. 빵값은 지불했지만 지금도 고마운 분이다. 머리며 옷이며 대충 치다꺼리하고 큰 가방메고 뛰고 다니다 몰골이 과하다 싶어 미용실에 갔지. 미용사분이 ’장사하세요?‘ 하고 물었어.’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아이를 업고 강의 준비하고, 논문을 쓰며 밤을 꼬박새우고 80세 할머님께 아이를 맡기고 출근을 하였다. 아플 수도 없는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할머님이 계셔 밤이나 낮이나 아이를 맡길 수 있어 행복한 엄마였다. 할머님은 어린애같은 손주며느리를 근심하며 도우미와 더불어 증손주 곁으로 오셨다.
엄마를 미워하던 아이들은 ’엄마도 힘들었어?‘ 하며 이해해주었으며, 아빠는 말이 없었음에도 아이들은 이해하였다. 이후로 부모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일상의 작은 일도 공유하여 서로 간에 모르는 일이 거의 없다. 장가든 아이는 전화를 길게 하는 편으로 남편은 ’이 녀석은 말이 너~무 많아. 팔이 아퍼‘ 하며 필자에게 작은 소리로 말한다. 아이들 마음에 있을 응어리와 분노를 풀 수 있어 너무도 다행이다.
뉴스에서 아무 이유없이 타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괴물을 본다. 가정에서 풀어내지 못하고 쌓인 상처와 분노의 분출일까? 가정이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야 함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채 부모가 되고, 일에 쫒기는 바쁜 일상에 아이를 후순위로 밀어놓은 결과물인가?
저출생의 영향으로 인하여 출산과 양육의 여건은 많이 좋아지고 있다. 아이가 있으면 경제적으로 보다 더 윤택해지고, 가정의 화목과 노후의 든든함도 기대할 수 있으며, 국가의 미래에도 기여한다는 명예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만들며, 행복한 부모와 아이는 건강한 국가를 만든다.
필자시대와 비교하여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일하면서 가정을 함께 잘 꾸려가는 것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쉽지않은 과제이다. 국가의 긴 시각에서 부모 측면, 아이 측면을 고려한 세분화된 계획과 지원이 필요하다.
필자는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많이 힘들었으나 지금 아이들로 인해 너무도 행복하다. 이제 곧 만날 손주를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그러하다. ’손주녀석 어느 구석엔가 남편과 필자의 모습도 좀 있겠지. 우리 아이와 며느리 어디를 닮아 나올까?‘ ’손잡고 여기저기 다녀야지‘ 생각이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