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볼때기 한 번 비벼도 돼요?

2005.06.15 09:38:00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아침의 등굣길은 아일렌베르크 리하르트의 아름다운 관현악곡 '숲 속의 물레방아'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나무숲에서 푸릉푸릉 날아와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달려오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도 이젠 새소리처럼 들린다.

아직도 꽃을 덜 피운 동백꽃은 잎새에 숨어서 숨바꼭질 하듯 피어 있고 철쭉도 꽃부터 피우려고 벌써 기지개를 펴고 있다. 지난해에 부지런한 이주사님께 머리를 깎인 키 작은 매화나무는 옹골차게 꽃들을 달고 봐주라고 손짓한다. 매화마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부르고 서 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찰을 하고 들어오니 은혜와 진우가 교실 바닥에 엎드려 독서중이다. 그런데 늘 단정하고 예쁜 은혜와 진우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머리를 긁적이고 얼굴은 얼룩덜룩하다.

"은혜야, 세수 안 했니? 머리는 왜 그래?"

은혜는 대답 대신 머리만 긁었다. 상황을 보니 아침밥도 먹지 않은 것 같고 이도 닦지 않았고 세수도 안 했다. 아이를 데리고 교무실로 가서 따뜻한 물에 얼굴을 씻기고 이를 닦게 하고 머리를 빗겼다. 알고 보니 외할머니께서 동네 어른들과 아침 일찍 봄나들이를 가시느라고 아이들이 등교 준비를 한 모양이다.

비상용 우유와 빵을 먹이니 곁에 있던 서효가, "맛있겠다. 나도 밥 한 톨밖에 안 먹었는데…" 한다. 먹고 싶은 마음에 과장법까지 쓰는 영리한 녀석. 말수가 적은 찬우는 나만 쳐다본다. 저도 먹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아침 독서 시간이 간식 먹는 시간이 돼버렸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니 이제는 다 커버린 우리 집 아이들 생각이 났다. 아침밥도 제대로 먹는지 지켜봐주지 못하고 늘 출근이 바빴던 엄마 탓에 점심까지도 혼자 챙겨먹던 우리 두 아이. 순간적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아들은 최전방부대에서, 딸아이는 혼자 대학에 다니며 학원 공부까지 하느라 밤 11시에 집에 들어오니 엄마 노릇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이제는 아예 토요일에만 집에 가니 딸아이는 거의 독립해서 사는 셈이다. 홀로서기를 그렇게나 강조하고 강요해 온 어미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먼 후일 나는 참으로 자식들에게 미안해 할 것 같다(지금도 늘 미안해서 혼자 울곤 하지만). 자식들에게 유년의 추억이 없는 어미의 자리가 아프게 다가선다.

그래서 나는 6학년 자녀를 둔 내 반 부모들이 공부를 위해서 자식들만 타지로 멀리 보내는 것을 극구 말리곤 했다. 자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초등학교와 중학교만이라도 곁에 두며 눈 맞추며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고….

실제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이나 대도시로 간 아이들보다 시골 학교에서 졸업한 제자들이 더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부모 곁에 있으니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농어촌 점수를 받으니 도시로 가서 내신 점수가 불리해진 아이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는 늘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왔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들었다. 배를 눌러서 만져보기도 하고…. 지난 해 가르친 5, 6학년 우리 반 아이들은 공부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칭얼대는 게 버릇이 되었다. 특히 정재성! 녀석은 유난히 엄마밖에 모르는 효자였는데, 2교시가 끝날 때 쯤 되면, "선생님! 아침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요. 뭐 먹을 것 없으세요?" 한다.

그럴 때마다 "요 녀석, 내가 네 엄마냐?" 하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간식거리를 주었다. 그 대신 공짜가 아니었다. 심지어 수학 문제를 풀다가 잘 생각이 나지 않으면, "선생님! 볼때기 한 번 비빌 테니 사탕 하나 주시면 안 돼요?" 하고 애교를 떨어서 기어이 볼 한 번 비비고 사탕을 먹곤 했다.

아! 그 행복. 우리 아들 대신이라는 변명을 붙여서 시작했던 작은 장난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금은 6학년이면서도 그 버릇은 6학년이 아니다. 우리 1, 2학년과 똑같다. 행여 제자를 성추행한다고 놀림 당할까봐 이제는 참고 있는데 녀석은 마냥 사탕 타령이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집에 가서 시장을 볼 때면 늘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챙기는 버릇이 들었다. 형성평가를 잘 해도 사탕, 공부가 재미없을 때도 꼬드기는 자료가 사탕이니 놀아주는 재주가 없는 내가 선택한 궁여지책이다.

그렇게 행복을 나누던 문화와 진호는 중학생이 되어 아침 일곱 시 차를 타는 지 얼굴 보기도 어렵다. 초등학교보다 훨씬 빠른 등교 시간에 맞추느라 아침밥을 굶고 가지는 않은지, 훨씬 많아진 학과 공부에 힘들어하는 건 아닌지….

이제는 나의 울타리를 떠나 더 너른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는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행복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속에서 발견된다'고 한 뒤랑 팔로의 말처럼, 나의 행복은 가족의 행복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이 행복한 데에 있으리라.

오늘 밤에는 우리 반 병아리들이 남기고 간 바람개비들이 주인 대신 날아다니며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면 참 좋겠다. 몸무게가 늘어서 태권도 학원에 등록한 나라가 잘 적응해서 몸짱이 되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기를!(오늘 점심시간에 떡볶이를 더 먹겠다고 한 것을 살찐다고 못 먹게 한 일이 마음에 걸리고 점심 후에도 독서한다는 걸 억지로 운동시키려고 뒷산에 같이 올랐다)

창밖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를 쥐가 소금 먹듯이 아끼며 살지만 그래도 시간이 가고 있나보다. '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고 한 앤드류 매튜스보다 나는 더 행복하다. 좋아하는 선생의 일을 좋아서 하기 때문이다. (2005년 어느 봄날에 연곡분교장에서 )
장옥순 담양금성초/쉽게 살까, 오래 살까 외 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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