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31년 전의 한 남자에게 책을 부쳤다.
“옥순씨, 아직도 책을 안 보내셨어요?”
“미안해요, 곧 보냅니다.”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디….”
지난 6월 15일은 우리 분교 전교생과 교직원들이 고창 심원면의 하전리로 갯벌체험학습을 가는 날이었다. 민간 기업과 자매결연으로 가게 된 곳이었는데, 텔레비전 카메라까지 따라오는 날이어서 더 신경이 쓰인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꿈에서도 잊어본 적 없는 마을 이름, 하전리! 31년 전 겨우 두 달 머물렀던 그 곳은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아버지’라는 단어처럼….
그 때 나는 정규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납부금을 내지 못해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은 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채 다시 주경야독 하던 때였다. 아버지 연세 마흔 다섯 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지만 원만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불행했던 아버지의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세상을 저버리려 했던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끝없이 옭아맸을 나의 존재는 아버지에게는 아픔과 희망이며 기쁨이기도 했었던 어린 시절. 그 때도 지금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그래도 굶주림과 질병으로 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억지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고 기억된다.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삶의 본능이 더 강한 탓일까? 우리 집은 바로 그 기초 생활 보장조차 안 된 경우였다.
병든 새어머니와 70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모시고 하전리로 흘러들어 가던 날, 아버지는 산길에 뛰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 속에서 등을 다쳐 그 길로 돌아가실 때까지 굽은 허리로 사셔야 했다. 가혹한 운명의 여신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꽃샘추위 속에서 바지락을 캐어 일당을 벌던 열아홉 살 처녀는 그 갯벌에 숱한 눈물을 뿌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평선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너무 아팠고 내 어깨에 달린 병들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릴 ‘ 그 무엇’이 절실했던 그 때.
두 달 동안 바지락 날품을 팔던 나는 1974년 5월 8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버이날에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고등학생용 통신강의록 한 권과 성경 속에 독한 마음을 품고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가슴 한 복판에 새기고서….
월급으로 그 때 돈 팔천 원을 받으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손에서 물이 마를 새가 없이 20개월을 살았던 서울 생활 속에서도 고등학교 과정을 혼자 공부하며 보던 새벽별의 속삭임은 어쩌면 나를 지켜준 수호천사였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바로 그 20개월 동안 나대신 병든 부모님을 지성으로 살펴준 은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고도 갚을 기회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나였기 때문에….
아무런 언질도 어떤 이야기도 흔한 편지 한 장도 주고받은 적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 부모님을 자식처럼 위했다는 후일담을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왔을 때 들었지만 일과 공부하는 일에만 매달린 내 귀에는 혼담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렇게 보낸 31년 후에 그 곳으로 갯벌체험을 갈 계획을 세웠다는 후원회사 담당자의 전화에 얼마나 설렜던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잊어 본 적이 없는 마음 이름과 그 분의 이름을!
6월 15일은 31년 전 서울로 떠나며 울던 내 모습이, 먼 길 보내며 하염없이 우시던 불쌍한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가랑비가 오고 있었다. 마을은 변했지만 산과 바다는 그대로였으니….
아이들과 바지락을 캐면서도 내 마음은 그 분이 지금도 그 곳에 살고 계시는지, 만나 뵐 수 있는지, 그것이 더 중요했다. 갯벌체험 책임자에 수소문하니 그 마을에 사신다고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떠나오기 몇 분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키 크고 수려하던 예전 총각 대신 든든한 가장의 모습을 지닌 그 분의 손을 처음으로 꼭 쥐며,(처녀 때 손을 잡았다면 마음이 통했을까?)
“우리 부모님께 잘 해 주신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꼭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어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드릴 틈도 없이 일정 때문에 바쁘게 떠나오면서 그 분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내 산문집을 보내겠노라고 약속하고 돌아서야 했다.
고생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아무런 혼수 준비도 필요 없으니 몸만 시집오면 된다고 했다던 31년 전의 잘 생긴 그 총각의 모습은 세월에 씻겨 중년의 아저씨로 변했지만 조건을 따지지 않고 측은지심을 보여주었던 따스한 마음만은 그 큰 눈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결혼의 희망이 사라진 후에도 변함없이 우리 부모님께 잘 해 주셨다던 그 분을 만나서 31년 동안 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 이 번 여름은 어느 해보다 아름다운 여름으로 남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은혜를 남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한 마디 말의 씨앗도, 한 순간의 베풂도 먼 후일 어디선가 반드시 열매를 맺음을 보았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배운다.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 김00님! 언제나 감사드리며 그 아름다운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 동안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제 고창은 미당 서정주님과 선운사, 김00님의 이름으로 제 마음의 깊은 곳에 보물처럼 숨겨 두렵니다.